정 종 암
작금의 한국사회는 세계 속 위상과 달리 삶의 질이 매우 낮다. 1등주의만이 팽배해 있다. 상대를 밟아야만 하는 못된 습성이 상존한다. 천년만년 살듯이 이기주의에 차 공존의 늪도 없다. 정의로운 삶은 손해를 본다.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 하이에나처럼 포식하려고 포효한다. 작금의 국정농단에서도 보듯, 끝없이 밝혀지는 부정의에 삶의 희망조차 잃는 이가 수두룩하다. 이 땅에 왔음도, 이승을 떠남도 동지임에도 긍휼의 미학이 부존재 한다. 이 시 한 수에 탐욕을 버리며 함께하는 삶의 기치를 되살려보자.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
-봄 밤, 도리원에서 잔치하며 읊은 시서(詩序)-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이부생약몽 위환기하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야)
況陽春召我以煙景 大塊假我以文章
(황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群季俊秀 皆爲蕙連 吾人詠歌獨慙康樂
(회도리지방원 서천륜지락사 군계준수 개위혜련 오인영가독참강락)
幽賞未已 高談轉淸
(유상미이 고담전청)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不有佳作 何伸雅懷
(개경연이좌화 비우상이취월 불유가작 하신아희)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여시불성 벌의금곡주수)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 집(여관)이고,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는 길손이라.
우리네 인생, 덧없고 짧음이 꿈과 같으니,
즐긴다한 들 그 얼마이겠는가.
옛사람이 촛불을 들고 밤에도 노닌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
하물며 따스한 봄날이 백가지 꽃과 아지랑이로 날 부르고,
천지는 나에게 글재주를 빌려 주었음에랴!
복사꽃과 오얏꽃 핀 아름다운 정원에 형제들이 모여 즐거운 놀이를 벌이니,
여러 아우들은 글 솜씨가 빼어나 혜련에 버금가는 데,
내가 읊은 시만이 강락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그윽한 봄경치의 감상이 그치지 않음에,
고아(고상)한 담론이 더욱 맑아진다.
아름다운 옥玉자리를 펴 꽃 앞에 앉아,
깃털모양의 술잔(羽觴)을 던져 주고받음에 달 아래 취하네.
이럴 때 좋은 시 짓지 않는다면 어찌 고아(고상)한 회포를 펴겠는가.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의 고사(故事)처럼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리라.

​*〔해설〕李白(701∼762)이 33세 때 읊은 것으로, 그는 동양 최고의 미인으로 회자되는 양귀비와 함께했던 중국 성당기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칭해지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春夜宴諸從弟桃李園序'로 된 판본도 있으며, 序란 연회와 송별회석상에서 지은 시를 모아 책을 편찬하면서 붙인 서문이다.
이 작품은 어느 봄날 밤에 형제와 친족들과 함께 복숭아와 오얏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연회를 열면서 각자 시를 지으며 놀 적에 그 시편 앞에 그 때의 감상과 일의 차제(次第)를 편 문장이다. 서(序)는 사물의 차제를 순서를 세워 서술하는 글이다.
짧고도 짧은 인생은 무릇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찌, 드넓은 세상도 쉬어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으리.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네 삶은 순차적으로 지위고하나 부의 과다를 막론하고 이승을 떠나기 때문이다. 예외 없이 나그네처럼 이승을 떠나가는 게 우리들 삶이어라.
이러함에도 뭇 군상들은 재물과 권력을 탐하며 약자를 짓밟기도 한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삶이기에 일찍이 '초로인생'이라고도 했다. 부귀영화를 차지하려고 닭싸움하듯 하는 아귀다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동 인간임에도 '슈퍼갑' 노릇에 찌든 한국판 정치 사기꾼들도 난장판을 벌리다가 끝내 간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시황제도 불로초를 구하려는 우둔함을 멀리한 채 겨우 쉰을 채우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갔다. 사랑하는 남녀가 이별하듯이 나도 가고, 그도 가는 게 삶일지라도 이백은 동양 최고의 시인으로 군림한다. 문필가는 이승에 재산은 남기지 못해도 족적만은 남긴다.
그러한 나머지 본 비평가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는 탐구와 함께 졸필을 굴리는지 모른다. 밝은 달빛이 꽃잎 사이로 어른거리는 속에 사랑하는 형제들과 친척들이 모여 이 시간 시를 토하니 유한한 인생이 무상하지 않고 영원함을 느낄 수 있었으리다.
간다. 가자. 가자.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저승을 향한 이생에 있어 지식이든, 세속적 부든 이 사회에 던지면서 가고는 영원한 삶이면 좋으련만.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말라. 그대가 사는 시간은 그대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설파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5현제 중 한 사람으로 철인황제(哲人皇帝)로도 불린다)의『명상록』을 되새겨 볼 필요성도 있지 않을까.


필자 / 문학평론가. 시사평론가. 객원논설위원. 한국법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저서> 정치평론집 밎 비평에세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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