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충분한 부(富)와 사회적 지위도 있을 때 이를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갖추는 일,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그리 간단하거나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난하고 지위가 낮을 때 그 입장에 맞게 행동해야 함은 물론이고 비굴해지거나 윗사람에게 아첨해서도 안 될 일이다. 이민족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에는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일이다. 곤란과 역경에 처했을 때에도 당황스러워하지 말고 조용히 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려야함은 물론이다. 조직에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불평만 늘어놓아가며 아무데서나 떠들어 대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말이다.
 안 해도 다 아는 빤한 소리이기도 하지만 교사와 부모, 책임 있는 어른들의 행동은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버릇이 없다거나 스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불평이나 탄식 속에는 어른들의 책임을 빼놓고 하는 소리다. 어른들 모두가 교육자의 입장에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스승으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야 할 사람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선 교사들과 가정교육을 맡은 부모의 책임에 제일 크다. 그 첫째가 인격적 성숙과 실력을 갖춘 스승과 부모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일이고, 다음으로 사랑과 정성이고, 또 다음으로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혼을 흔들어 깨워 주는 열정을 갖추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주기 이전에 올바른 정신의 문을 두드려 주는 것이 그 시작이라는 말이다. 양심의 눈을 뜨게 하고 자아의 눈을 뜨게 하고 천분(天分)에 눈뜨게 하여, 먼 훗날 그 아이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스승과 부모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솟아나게 할 일이라는 말이다. 

 고려 말 목은, 포은과 더불어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지는 야은 길재(吉再)는 지금의 선산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창왕 때 문하성 주서로 일하다가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지극한 그의 효성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이 효행은 조선의 태자로 책봉된 이방원의 귀에 들어갔고 길재를 조정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산의 지방관이 길재를 찾아와 사정하였다. ‘선생께서 동궁 저하의 명을 따르지 아니하시면 소관의 목이 달아납니다. 소관을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매우 딱한 일이었다. 그는 입장이 난처했지만 일단 역마를 이용하여 송도로 달려와 방원을 만났다. ‘야은, 백성들은 고려조에서도 조선조에서도 한 백성이오, 그대는 백성들을 위해 출사하여 경륜을 아끼지 마시오’. ‘저하, 이 몸은 초야에 묻혀있는 몸이옵니다. 학문에 듯이 있사오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벼슬을 사양한 길재는 상소를 올렸다. ‘소신은 저하와 더불어 태학관에서 함께 시경(詩經)을 읽었사옵니다. 오늘 저를 부르신 것은 옛 정의를 잊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하오나 제가 고려조 때에 제가 과거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벼슬에 듯이 없어 벼슬을 버렸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 하옵니다. 지금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 하옵니다. 지금 옛 정으로 부르시니 소신은 저하를 뵈옵고자 왔을 뿐, 벼슬은 제 뜻이 아니옵니다’. 길재는 다시 상감(정종)에게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정종은 길재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고향으로 돌려보낸 후, 납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후 세종은 길재의 아들 길 사순을 불러 종묘 무승의 벼슬을 주었다. 아들이 세종에게 불려 갈 때 길재가 말했다.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하. 은. 주 3대 이후에 드문 일이니라. 네가 초야에 묻혀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네. 그 은혜가 비할 데 없구나. 네가 마땅히 아비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는 조선 임금을 잘 섬기거라’. 절의의 한계가 분명한 길재였다. 아들은 고려조에 신하가 된 적이 없으니 출사하여 조선의 임금을 섬기라 한 것이다. 그는 명분이 뚜렷했던 그는 세종원년(1419년)에 세상을 떴다.
 그 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이 금오산을 지나가다가 야은에게 시 한 수를 바쳤다.

 ‘길 야은이여, 서리보다 차고 물보다 맑도다.
 명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의는 산보다 무거우니
 공과 포은이 이치를 알리라
 포은은 몸소 두 성 임금을 겪었으니
 좋은 가지에 한 치가 썩었고 거울 가운데 티가 있다.
 공의 몸 맡긴 곳은 한 임금뿐이니
 진실을 알고 독특히 행함은 비할 이가 없구나’.

 포은의 두 성 임금 섬겼다는 말은 고려 말 조선의 창업자들이 주장한 우왕과 창왕이 요승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구실을 붙인 조선 창업의 당위성을 말함이니, 그 시대에 야은은 창왕이라는 한 임금만 섬긴 반면, 포은은 신씨(신돈의 아들)가 아닌 왕씨(공양왕) 까지 섬겼다는 포은에 대한 약간의 흠집 내기인 셈이다.
 그 후 경상감사 손 순효가 금오산 밑 길재의 처소에 가서 글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사당 밑에서 절하고 우러러 보네 거동과 형상이 보이는 듯 하도다.
 금오산과 낙동 강수는 어제 같은데 선생을 생각하노니 어디에 계신고
 초황(바나나)과 여단((향풀)을 올리니 바라건대 영령을 돌보소서’.

 길재의 동향 인 이오 제자이기도 한 김종직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김종직이 죽은 뒤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했지만 그의 제자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통하여 조선의 학문을 이어가게 만든 것이다.
 얼핏 보아 그리 화려하지도 못하고, 피를 흘려가며 불의에 맞서 싸운 일도 없으련만 조용한 가운데 사람답게 행하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후세들에게 물려 준 야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문과 교양을 갖추었다 해서 덕망까지 갖추기는 어렵다. 유덕한 사람이란 학문과 교양을 바탕으로 인생을 충분히 이해하는 신뢰와 사랑으로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사회질서 유지에 이바지하는 자세 또한 잊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대한 기여가 학문의 기초라는 점을 본보기로 보여 준 야은의 학문이자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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