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소! 당신이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그래, 내가 담배 피우는 게 아니꼽냐? 이 담배 당신이 사준 거냐?” 하면서 한참동안 째려보더니 땅바닥에 침을 ‘캭’ 하고  밷고는 어깨를 건들거렸다. “에이! 호로 자식!” 하면서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경쟁지상주의 인재교육과 물질만능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하니 그 젊은이가 불쌍했다.

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예의’란? 사회생활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존중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을 말한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최근에는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예의’가 실종되어가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을 필자만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시사 신문 독자들도 실감하고 있는지 궁금하며 이런 현상을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해결책을 묻고 싶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동쪽에 있는,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라는 뜻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민족은 예의바른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예의’는 인간이 동물과 서로 다른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구분이며 이런 삶을 살아왔다는 우리조상들에 대해 긍지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의’는 인간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며 이의 습득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인성교육의 반복적인 지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교육이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며 그것의 실체는 바람직한 변화의 추구이다. 자연적인 변화가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에 의한 변화이다. 교육활동의 결과로 교육의 목표가 추구하고자하는 방향으로의 인지적 혹은 행동적 변화가 없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말은 아무 곳에나 붙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성교육이라는 말은 성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해 교육을 받는 대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 목표일 것이고 그렇게 변화되었다면 그건 성교육이 성공적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성교육도 마찬가지다. 인성교육은 주로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위주로 실시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을 바람직한 인성으로의 변화를 위해 교육을 했다면 학교폭력이라든지 성폭력 같은 반사회적 문제가 나타나는 비율이 교육이전의 상태보다 현저히 낮아져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 인성교육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반복 지도했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인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지 못했다면 그건 학교 인성교육이 실패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학교의 인성교육은 교양과목이 되어서는 안 되며 말씨교육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예의바른 언행은  말씨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 갈등의 원인은 말씨에서 출발한다. 말씨를 통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라든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격언은 인간관계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묵시적으로 경고한다고 봐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인성과 예의의 바탕은 말씨에서부터 출발한다. 말씨에는 높임말과 예삿말과 낮춤말이 있다. 어른에게는 반드시 높임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말씨는 언제나 부드러워야 한다. 우리말은 같은 어휘라도 억양의 높낮이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어른이나 부모에게 낮춤말이나 예사말을 쓴다. 서양 언어의 아이와 유우(나와 당신)이다. 언어의 이상한 평등이 된 것이다. 요즘 부모님에게 높임말을 쓰는 아이들 구경 한번 못했다. 어른과 아이가 언어로 맞먹는 것이다. 높임말과 예사말 그리고 낮춤말은 우리 언어에만 있는 고유의 훌륭한 문자인데도 그걸 버리고 서양식 언어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낮춤말을 잘못 쓰면 속된말이 된다. 속된말을 자주 쓰면 정서가 둔해지고 인성이 야비해진다. 언어의 평등 된 사회에서 어른을 존경하고 부모님을 공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인성교육을 하기 전에 적어도 말씨교육부터 시켜야 한다. 말씨 속에 ‘예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른께 높임말을 써야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말의 습관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교육시키자. 어른이나 부모님이 부르시면 반드시 “예‘ 하고 대답하여야 한다.
 어떤 일을 시키면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 하여야 한다.
 “저건 아버지 니가 하고 이건 내가 한다, 엄마, 어데 가노?”
 어른과 맞먹는 언어를 쓰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어른이 수정 시켜야 한다. 요즘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그래 네가 뭔데 나를 훈계할 수 있냐?”
 이런 사고방식이 사회전체에 팽배한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걸 무시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는 ‘예의’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어쩌면 한심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군내버스를 타려고 간이 주차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내 옆에 앉더니 담배연기를 내 옆얼굴에  한참동안 내 뿜더니만 담배꽁초에 불이 붙은 상태로‘ 휙’하고 내 앞으로 던졌다. 내 신발 앞에 떨어진 담배꽁초에서는 불꽃을 태우며 하이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젊은이, 담배를 피우고 함부로 버리면 어쩌나!”
 “보소! 당신이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그래 내가 담배 피는 게 아니꼽냐? 이 담배 당신이 사준 거냐?”
 하면서 한참동안 째려보더니 땅바닥에 침을 ‘캭’ 하고  밷고는 어깨를 건들거렸다. “에이! 호로 자식!” 하면서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경쟁지상주의 교육과 물질만능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하니 그 젊은이가 불쌍했다.
 내 사고방식이 유교의 잔재물이거나 낡은 공자시대의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발길을 돌렸다. 아니 내 행위에 대한 젊은이의 태도가 정당화 되어버린 현 시대의 사태에 나는 억지로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와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의 잘못일 것이다. 오로지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리고 물질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시대상황에 의해 사람들은 마치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 듯 물질욕구만이 충족하기에 바빴고 그 피해의 결과가 고스란히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리라.
 “어쩌다 젊은이들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젊은이는 사회적으로 이름깨나 있는 당신의 자녀일수도 있다. 아니 어떤 희귀한 상황에서는 어른에게 매우 친절하며 예의바른 행동을 하는 젊은이 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젊은이의 말씨와 태도는 분명히 ‘예의’를 물구나무 서기한 것은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물구나무서기는 낱말 그대로 세상이치를 온통 거꾸로 보는 시각이다. 아버지가 자식처럼 보이고 자식이 아버지처럼 보이며 하늘이 땅으로 보이고 땅이 하늘로 보이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로 보이고 아내가 남편쯤으로 보이는 것이다. 위아래의 구분이 없다. 뒤죽박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삐뚤어진 젊은이의 사고방식을 바르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굽어진 것을 바르게 수정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이란 도대체 의미가 있는가? 그게 민주사회인가? 그저 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군상들이 웅크리고 모여 있을 뿐 그곳에는 욕구불만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공허와 허무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은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가 아니라 아이를 공경하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아이를 공경하고 어른이 아이에게 ‘예의’를 표하는 ‘예의’가 물구나무 서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시내버스에 빈자리가 있으면 노인들을 먼저 앉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를 먼저 앉게 한다. 아이는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갈 장래의 젊은이라나!” 아니 빈자리는 먼저 앉는 이가  주인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노인이 뭔 대수람.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진 쓸모없는 늙은이가 뭐이던 양보해야지. 이런 시대에 ‘예의’교육이다, 인성교육이다.’ 한다고 떠들어도 말짱 헛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성교육은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를 위한 반복훈련이다. 잘못된 행동양식이 변화를 일으킬 때까지. 그러나 작금의 시대 아이들은 학교교육으로 인하여 좀처럼 변화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모든 생활방식이 개인의 의지대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예의’가 상품화 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의’가 교양이 되어버린 시대가 된 것이다. ‘예의’는 항상  갖추어야 할 행동양식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변모하는 인간 처세술이 된 것이다. 예의도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빈부의 격차에 따라, 상대방의 옷차림에 따라, 상대방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의 레벨에 따라 달라지는 탈바꿈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씨에서부터 우리는 실감할 수 있다. 노인이나 나이 든 사람에게는 높임말을 아랫사람에게는 낮춤말을 그리고 동년배의 사람에게는 예삿말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교육의 기본이 아닐까? 어른과 아이에게 쓰는 말씨가 구분이 없는 시대, 노인이 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교양 있고 품위 있어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예의’가 물구나무 선 시대가 된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인격이 필요하다나! 말씨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교양과 지식과 학문의 수준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씨에 달렸다. 속된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 품성마저도 속된 것이다. 상대방의 인격을 가름 하려고 하면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보아라. 상대방에게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던져보아라.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한편으로는 그 젊은이가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저런 인성과 예의가 저 젊은이가 살아가는데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시대 사람들은 불의나 비인간적인 상황들에 접해서는 그걸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시대는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벌 규정은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인성교육의 부재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늙은이들이 젊은이들 위에 군림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른과 아이는 구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한참동안 떠들었지만 그게 뭔가? 이젠 밥상머리에 앉으면 음식을 아이들이 먼저 먹는다. 노인들은 아이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별도로 먹는다. 그것이 당연시 되어버린 시대이다. 젊은 여인들이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이고는‘좋아’라 하고 깔깔되며 박수를 친다. 지 부모보다는 자신의 자녀가 더 중요하며 아이가 집안의 어른이 된 것이다. 아이는 집안에서 특별대우와 배려를 받는다.

 어느 중등학교의 기간제교사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요즘 학생들 왜 이리 버르장머리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학부모님이 햄버거를 보내 주신다기에 학생들 위화감도 생기고 그러니 안 보내 주셔도 된다고 극구 사양을 했는데 끝까지 보내주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수업이 모두 끝난 뒤 방과 후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학생40명에 담임인 저까지 포함해서  총 41개의 햄버거가 방과 후에 교실로 왔습니다. 반장과 부반장보고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애들한테 나눠주더군요. 반장과 부반장이 내가 교탁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인 저한테 먼저 음료수와 햄버거를 올려놓을 줄 알았는데, 그냥 애들한테 먼저 나눠 주더라고요. 중간쯤 나눠졌을 때 반장이 햄버거 하나를 놓쳐서 종이 랩이 풀어지면서 햄버거가 교실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반장이 그 햄버거를 얼른 주어 종이에 싸서 햄버거 박스에 놓더라고요. 한쪽 구석에. 저는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반장이 모든 애들에게 햄버거를 돌리고 아까 바닥에 떨어진 햄버거 하나가 남는다면서 저에게 가져와 선생님 드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참 어이가 없어서 이거 햄버거 바닥에 떨어진 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반장이 맞다 고 하더군요. 순간 열 분을 못 참고 "이 싸가지 없는 년아! 나보고 먹으라고! 너나 쳐 먹어!" 이러고는 햄버거를 교실 뒷벽에 내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교실 뒤로 날아간 햄버거가 공중분해 되면서 교실 뒤 하얀 벽에 찰싹 붙었다 떨어지면서 보름달 문양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순간 교실 분위기는 싸해졌습니다. 반장과 부반장에게 물었습니다.
 “너네는 집에서 부모님과 햄버거 먹을 때 너 네 먼저 먹냐?”
 이렇게 따지듯 물었더니 자기네 집에서는 자기들 먼저 먹는다고 그럽니다.
 순간 참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언젠가 한번 교실의 제 뒤에서 지들끼리 하는 얘기를 모르는 척 우연히 들었는데 저를 두고 시발 년이라더군요. 저 역시 완전 지 멋대로 말이 안 되는 아이라 사춘기려니 생각하고 무시 했어요. 며칠 전 우연히 문제지 풀고 나더니 또 제 뒤에 대고 지 친구에게 저 시발 년이 어쩌구, 아주 욕설이 술술 나오는데 그냥 지나쳤습니다. 근 10년 가까이 가르쳐왔지만  시발 년이라는 얘기 처음 들어보는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시사 신문 독자들께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보편적으로 일부 학생이라고 넘겨버린다. 그러나 일부가 아니고 대부분이다. 선생님에 대한 인사도 하지 않는다.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몇몇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하지만 다른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것이 학교 인성교육의 실제적 현실이다.
 우리사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아이들이 왜 ‘예의’에 대해 물구나무서기를 하는가? ‘예의’가 처세술이 되어버린 시대의 경쟁지상주의 인재교육과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 낸 인과응보이다. 그것은 국가의 부강이 아니라 나라를 망치고 국민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만 살 수 없는 것이며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필자 남 덕 현은 1949년 고성읍 동외리 정동(솟골)에서 출생하여 고성 초. 중학교 및 통영고와 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초등학교장으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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