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눈물의 항도 목포, 이별의 항도 부산, 이별과 눈물의 이 두 항도는 일정 시대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 까지 우리 모두의 애환과 눈물의 대명사라 해도 좋을만한 수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다. 망국의 설움 속에서도 행여나 고향 땅에서 살아볼까 하고 아득바득하여 애서 보았지만 살아 갈 길이 막막하여 탄광이나 광산의 인부로 글려가지 않으면 아 되었던 이들, 부산항 부두는 울며불며 헤어지는 그들의 오열이 그칠 새 없었던 이별의 항도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담고 태어난 노래가 ‘울며 헤진 부산항(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다

 울며 해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 온 달 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음 음 음 음...

 달빛 아래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검은 수평선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음 음 음 음....

 당시 일본 오오사까 부산항을 오가는 관부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나 오래도록 지낼 때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타국으로 떠나가는 실향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기 여행을 떠나는 경우에도 조국을 떠난다는 생각과 나라 잃은 설움에 두 눈에 뜨거운 이슬이 맺혀 흘렀다. 그래서 부산항은 이별의 상징이요 눈물의 상징이었다. 검푸른 파도에 한가로이 날아드는 갈매기를 보아도 서글픈 감정만 북받치고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석양 빛 노을까지도 처량하게만 여겨졌다.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릴 때면 연락선 난간머리에 매달려 울며불며 오열하는 여인들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슬그머니 돌아서서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닦는 여인들을 볼 때 이별하지 앟ㄴ는 사람들도 가슴이 메어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이 비탄에 젖고 진부한 형태에 머물러 있을 때 서정성 짙은 노래가 나왔으니 바로 ‘서귀포 칠십 리(조 명암 작사 박 시춘 작곡 남 인수 노래)’가 그 시작이다. 여수에서 400리, 목포에서 350 리 거리에 잇는 제주도이지만 일정 때 까지만 해도 목선을 타고 파도 사나운 수 백리 길 제주를 오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음악인들이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육지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이 건너 간 일도 없고 보니 제주도가 노래의 빈곤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 노래 가락으로 ‘동백 따러 가자’, ‘오돌 독’, ‘달거리 노래’, ‘제주도 타렬’, ‘천 고리 만 고리’ 등이 전해 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제주도를 소재로 한 가요로서는 서귀포 칠십 리는 현대적 가요로서는 첫 직품인 것이다.   
 
 바닷물이 철석 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돛대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 리에 물새가 운다

 석양의 금빛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수면에 어리는 서귀포의 아름다운 경치는 우리나라 해경 중에서도 절경으로 이름 나 있고 시내의 동쪽에는 정방폭포가 또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연외천이 흘러내리는 좁은 골짜기에는 천지연 폭포가 있다. 그래서 서귀포에는 명승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귀리와 보목리를 걸쳐 칠십 리의 긴 해안에는 해녀들이 하루 종일 물속을 자맥질 하면서 해삼, 섭, 굴, 미역 등 해산물을 따 가지고 나오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느껴지는 곳이다. ‘서귀포 칠십리’는 나라 잃은 식민지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그리운 심정, 빼앗긴 나라도, 헤어진 부모 형제도, 사랑도 또 그리움에 목메는 심정을 서귀포의 자연과 바닷가 아가씨에 의탁하여 노래한 가요이다. 이는 작사가 조명암(본명 조영출)의 말이다. 가사에서 ‘휘파람도 그리워라’ 한 것은 흔히 심심풀이로 노래의 선율을 불어 넘기는 그런 휘파람 소리가 아니라 해녀들이 물속에 깊이 자맥질 하였다가 수면 밖으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가쁜 숨을 휘 휘 내 뿜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작사자와 작곡가는 이것을 휘파람 소리로 묘사하면서 해녀들의 억척같은 근면한 삶을 그리움에 실어 담고 있으며 망망한 수평선에 두둥실 떠가는 쌍돛 배를 그리운 조국에 은유한 것이다.

 자개 알이 철썩 철썩 물에 젖은 서귀포 조개 줍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저녁달도 그리워라 저녁별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 리에 황혼이 온다

 2절에서는 바닷가의 자개 알과 조개 줍던 아가씨를 비롯하여 저녁달과 저녁별 등 빼앗긴 조국의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런 점들로 인해 1930년대 말 경에 이 노래가 급속히 유행을 타게 되고 제주도 해녀들의 애창곡이 되어 왔다. 해녀들 치고 휘파람을 못 부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제주도의 해녀들은 더욱 휘파람을 잘 불었다. 물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다가 휴식을 할 때면 때로는 육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보다는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어 넘기곤 하는 것이 해녀들의 일상적인 특성이다. 그들이 운치 있게 가락을 불어 넘길 때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휘파람 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곤 하였으며 한 사람, 두 사람,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신이 나 경쟁적으로 노래를 부르곤 하였는데, ‘서귀포 칠십리’가 세상에 나온 이후 재주도 해녀들은 물론 다른 지방의 해녀들도 이 노래를 휘파람 곡으로 부르곤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국을 포함한 모든 잃어버림을 애절하게 그리워한 노래 ‘망향초 사랑(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백난아 노래)’이 있다. 
 
 꽃다발 걸어주던 달빛 푸른 파지장 떠나가는 가슴에 희망초 핀다
 고동은 울어도 나는야 웃는다 오월 달 수평선에 꽃구름이 곱구나

 물길에 우는 새야 네 이름이 무어냐 뱃머리에 매달린 테프가 곱다
 이별은 슬퍼도 나는야 웃는다 그믐달 수평선에 파랑새가 정답다

 망향초 피어나던 꿈이 어린 옛 추억 정든 포구 떠나니 그리워진다.
 노래는 슬퍼도 나는야 웃는다 어둠 실린 이 강산에 희망은 밝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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