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자본가인 지주가 땅을 비려주고 지대(수곡)를 받아 챙기는 것은 완전한 착취행위라는 것이 이는 바 리카르도가 제시한 ‘지대론’의 요지다. 소유지가 없는 농민이 경작할 땅을 빌릴 때 그 농지는 비옥도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땅은 척박해서 생산물이 조금 밖에 안 나오고 어던 땅은 비옥해서 비료도 안 주고 김도 안 매어도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지주는 생산비를 조금밖에 안 들이고 많은 수확을 하는 땅을 빌려 줄 때 아주 척박한 땅을 빌려 줄 때 보다 지대를 더 받으려고 한다. 땅의 품질에서 지대의 차이가 발생하지만 지주가 한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 인구는 언제나 증가하게 되어 있고 이에 따른 식량 수요 또한 늘어나게 되어 있다. 땅은 더 많이 필요로 하고 그래서 질이 나쁜 땅도 자꾸 더 많이 경작하게 된다. 곡물의 값은 척박한 땅에서 생산한 곡물 값으로 정해지니 비옥한 땅에서 곡물을 생산한 지주는 돈을 많이 번다. 지주에게 부당한 이익이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대외 무역(수입)으로 곡물 가격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초판에만 나오는 이 유명한 구절은 ‘인구론’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즉 인간은 가급적 자손을 많이 낳으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방치할 경우에는 결국엔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서 파국이 불가피하리라는 것이다. 맬더스는 인구가 대략 25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므로, “2세기 뒤에는 인구와 생활 물자 간의 비율이 256대 9가 되며, 3세기 뒤에는 4096대 13이 되고, 2천 년 뒤의 차이는 거의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빈민의 인구 증가를 억제해 식량 생산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맬더스는 주장했다. 억제 방법에는 전쟁, 기아, 질병처럼 사망률을 높이는 ‘적극적 억제’와 출산율을 낮춰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예방적 억제’가 있다. 물론 맬더스는 예방적 억제를 권장했고, 효과적인 피임법이 없었던 당시였으므로 대신 결혼을 늦추거나 출산을 자제하도록 빈민을 계몽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실 그가 제시한 대책보다는 오히려 파국에 대한 예언 쪽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사실 맬더스의 경고는 기득권 세력에게 지극히 반가운 소식이었으리라. 빈민 구제나 사회 복지가 자칫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맬서스는 임금 상승을 비롯해서 인구 증가에 일조할 만한 요인은 모조리 반대하며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사회 불평등을 옹호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맬더스에게 어떤 악의나 숨은 의도(가령 우생학적인)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빈곤과 인구 증가 중에서 전자보다 후자가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으므로 더 작은 해악을 감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재난이 생길 경우에 더 큰 고통을 받는 쪽은 항상 부자가 아니라 빈민이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인생살이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보는 ‘토종비결’의 저자 이지함은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이자 기인이다. 실학이 봇물을 이루었을 때가 정조(22대) 때인 18세기 후반이었으니 이지함은 실학이 대두하기 200년 전부터 실학의 실효성을 몸으로 보여준 시대를 뛰어넘은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 목은 이 색의 후손인 명문가의 양반이었으나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 솥뚜껑을 뒤집어쓰고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다녔다. 솥뚜껑을 뒤집어 쓴 이유는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고 그가 전국 유람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디서든 밥해먹기 편하도록 머리에 솥을 쓰고 다녔다고도 한다. 그는 학문에만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복서, 잡학, 산수, 소리에도 능했다. 게다가 관상, 신장, 비결 등 통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식하였다. 이지함이 살았던 시절의 양반은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죽치고 앉아 현실과 동떨어진 허망한 경전의 구절만 외우고 있던 16세기였다. 이 때 그는 ‘농촌 경제에만 갇혀있지 말고 상공업, 수공업,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전반적인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주장한 실학사상의 선각자였다. 이지함이 상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찾아간 곳이 화담 서경덕의 문하였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모인 인물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던 개방적 학풍의 지식인 모임이었다. 이지함 자신도 탁월한 장사꾼이었다. 몸소 상업을 경영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고 수완이 좋았던 그는 장사를 할 때 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번 것이 아니었으니, 장사를 할 때 마다 이익금을 곡식으로 바꾸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양반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몰매 맞을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사회는 한 번 장사꾼이 되면 그 후손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할 만큼 상업을 천시했다. 이지함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같은 양반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거나 막일을 하는 상인들과 천민들이었다.
 이지함은 시끄러운 세상에 출사를 단념했으나 잠깐 지방 수령을 지낸 일이 있다. 그는 지방 수령을 지내면서 상소를 올려 백성들의 자급과 국부 증진에 대한 주장을 피력했다. 당시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다구나 성리학의 폐해로 다른 학문이나 상업을 천시하던 풍조에서 그는 산업의 가치를 중요시하여 상업, 어업, 수공업, 광업 등의 적극 개발을 나라에 강력히 건의했으나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접한 이지함은 조정에서 땅이며 바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국부를 늘리고 백성들을 자급하게 하는 것만이 골 깊게 패인 가난의 병폐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역설한 것이지만 어느 하나도 채택된 것이 없다.

 리카르도는 산업 활동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가장 큰 몫의 지대를 챙겨가는 지주들의 몫을 대폭 줄여 분배의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인 반면, 맬더스는 자본가나 지주 계급을 옹호하면서 인구 증가의 주범인 농민과 서민들의 인구가 심하게 늘어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질병, 전쟁, 산아제한 등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된 두 사람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토정 이지함도 이대로는 안 되니 전력을 다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또 그의 토정비결에 의하면 인생 항로에는 온갖 길흉화복이 도사리고 있거나 준비되어 있으니, 최선을 다해 재앙은 피하고 적극적으로 복을 불러들이라는 계시로 되어있다. 방법은 제 각기 다르지만 앞일에 대비하자는 데는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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