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ㄱ'자 한 자 쓰고 보니 기억 하세 기억 하세 국가수치 기억하세
 우리 대한 독립하면 영원만세 무궁토록 강구연월(康衢煙月) 태평가에 자유 복락 누리련만
 금일 수치 생각하면 죽기 전에 못 하겠네

 ‘가’자 한 자 쓰고 보니 가련하다 우리 동포 국대척소(跼大斥小) 하는 모양
 고할 곳이 전혀 없네
 무지불인(無知不仁) 창귀(倀鬼)는 월급분에 탐이 나서 왜인에게 첨부(諂附)하야
 자가형제(自家兄弟) 상잔하니 기막혀서 못 살겠네
 
 ‘나’자 한 자 쓰고 보니 나라 파는 대관 남산 첩경 쫓아가서 혼야걸애(昏夜乞愛) 일만 삼고
 권고해도 불청이요 논박해도 무용이라 답답할사 이내 심사 저 인물을 어찌할고

 1909년 10월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장탄 국문가(長歎 國文歌)’라는 노래로 각설이 타령 또는 품바타령이라는 거지들의 노래를 빌렸다. 한일합방 직전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大官)에 대한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다시 1920년대에 들어서자 썩어 문드러진 친일 매국 분자들의 활동이 자심해지고 매국해위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족속들이 늘어갔다. 이 때 그들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도 하나의 노래 ‘이 풍진 세상’이 나온다. 작사자는 미상이고 곡은 미국 곡이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도 다시 꿈같도다

 담소화락(談笑話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0에 심몰하여
 전정사업(錢情事業)을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반공중(半空中)에 둥근 달 아래 갈 길 모르는 저 청년아
 부패사업(腐敗事業)을 개량토록 인도 합소서

 먼지바람(風塵)의 세상에 영합하여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빌붙어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니 족하냐고 묻는 가사로 되어 있다. 주색잡기에 정신을 팔아 반공중에 둥근 달 같이 마음이 들떠 갈 길 모르는 청녀에게 그 부패한 정신에서 돌아서라는 말이 포함된다. 일본의 깃발은 붉은 태양을 상징한다는 데서 이를 둥근 달로 슬쩍 바꾸어 놓았다. 둥근 달은 지금이 절정이고 이내 이지러지기 시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둥근 달이 대낮 같이 밝으니 길을 잃을 일이 없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친일분자들은 바른 길을 잃고 있다는 훈계이다. 이 노래는 ‘희망가’ 또는 ‘탕자 자탄가’ 등으로 제목이 붙기도 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탕자 경계가’가 있는데 가장 걸 맞는 이름 같다. 매국노의 수괴 이완용을 비롯하여, 일본인 통감에게 합방 청원서를 낸 일진회 이용구, 썩은 목이지만 일본을 위해 헌상하겠다고 한 내부대신 송병준, 을사조약에 대표로 서명한 박제순 등 모범 매국노들로부터 가지를 친 친일 분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이 노래로 통렬하게 비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1919년 3.1운동 후 1930년 까지가 우리에게는 절망의 절정이었고 이를 반영하여 우리나라의 첫 레코드 녹음으로 ‘내 고향을 이별하고(1925 안기영)’가 나왔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관에 와서 적적한 밤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맘을 아아 누가 위로해

 내 고향을 떠나올 제 우리 어머니 문 앞에서 내 손 붙잡고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타

 1923년 우리나라 동요의 효시로 꼽히는 ‘반달(윤극영 작사 작곡)’ 또한 나라 잃은 애통함 그대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k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쳐 있는 곳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또 이어 1926년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되는 윤심이 부른 ‘사(死)의 찬미(讚美)’가 열풍같이 이 나라를 휩쓸었다. 목포출신 부호의 아들이자 작곡가인 김우진과 평양 출신 미모의 소프라노 성악가 윤심덕은 연인 사이였다. 윤심덕이 일본 대판의 일동(日東) 축음기 회사에서 ‘메기의 추억’, ‘어여쁜 새악시’ 등 몇 곡의 노래를 취입할 때 김우진도 함께 있었다. 계획된 노래들을 다 취입한 그들은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 ‘다뉴브 강의 물결’에 우리 말 가사를 붙인 것이 사의 찬미가 된 것이다. 죽음을 찬미한 노래 말과 같이 그들은 현해탄을 건너오던 배 위에서 껴안고 떨어져 꽃잎처럼 잠들었다. ‘사의 찬미’를 실천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에서 새 삶을 얻는 신앙이 있었기에 ‘부활의 기쁨’이란 노래를 레코드 판 ‘사의 찬미’ 뒷면에 붙여 놓았다. 이들의 생각이야 어쨌든 당시 3.1 운동의 실패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승하로 울적하던 조선 백성들에게는 이 노래가 애달픔을 실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순종황제의 백일재(百日齋)에 맞추어 이들이 몸을 던진 것이다.  
이제 영원히 이러한 치욕의 비극을 맞지 않으려면 언제까지고 이런 슬픔과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할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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