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우리에게 닥쳐오는 변혁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시간관념이나 역사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역사란 과거지향이 아니라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힘 또한 역사에서 나온다는 '역사는 미래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하늘(天神)은 다 할 수 있다는데서 신(神)을 받들게  되고, 그 신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 토템(totem)은 모든 인간사회를 지배해 왔다. 우리 광명(光明)의 한(韓) 민족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로 이주하기 이전 만주 또는 바이칼 호 근처에 살 때 곰(熊)을 주된 토템의 대상으로 하였지만, 더불어 신령스러운 용(龍) 또는 봉(鳳)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새(鳥)는 하늘과 땅 ‘사이’인 공중을 날면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뜻을 하늘에 상달하는 신성한 동물로 받드는 데서 새를 가리키는 봉(鳳)을 매우 소중히 하였다. 우리 동이(東夷)의 한 갈래 중 새를 토템으로 하는 한 갈래를 조이(鳥夷)라 하였는데 이들은 하북성 역수(易水) 및 연(燕) 일대에 분포하다가 인구가 증가하고 씨족 조직이 분열함에 따라 중국의 하. 상(夏 .商) 시기에 인이(人 夷), 욱이(郁夷), 조이(鳥夷)의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이 중에서 또 한 갈래인 회이(淮夷)가 있었으니 이들은 중국의 동해 해안을 따라 회수 이남까지 이동하다가 춘추전국 시대에 초나라에 합병 되었다. 이들 회이(淮夷)의 핵심 세력을 서이(徐夷)라 부르니 이들은 제우(帝禹) 때의 신하인 백익(伯益)의 후손들이다. 이 서이는 동방의 토착민으로서 춘추시대 이후 오(吳), 월(越), 초(超) 문화의 중요한 원천일 뿐만 아니라 후에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전혀 우리역사와는 무관해 보이고 오히려 중국 역사로만 보이는 위 사실들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항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지만,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는 이들의 뿌리가 있었고 그 뿌리가 있었기에 삼국시대 까지 삼국의 통치하에 있던 중국 해안 지역이 고구려가 망한 후에도 고구려 출신 장수 이정기가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 큰 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맞서 싸웠고, 후에 신라방이란 이름만 남긴 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지만 이 역사적 사실만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중국사에서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는 건국 초부터 고조선의 도움을 받았고 고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 하나라에서 상(商 또는 殷)나라에서 주(周)나라로 넘어갈 때에도 고조선의 힘이 작용하였다. 상나라의 초대 왕인 탕왕이 하나라 폭군 걸 왕을 때에도 13세 흘달 단군이 도와주었으니 말기에 포악한 군주로 변했을 때 탕왕의 편을 들어 준 것이다. 상나라 시조인 설(契)의 어머니가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전형적인 동이족의 탄생설화이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 또한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많은 병력과 전차를 보유한 상나라를 물리치기란 매우 어려웠다. 단군조선의 지원 아래 다수의 동이족 제후들에게 협조를 구한 것이고 그 중 한 사람이 강태공이다. 주무왕은 주나라 건국을 도운 강태공을 산동 반도 지역의 제나라의 제후로 봉했다. 강태공의 공적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지만 동이족 출신인 주 왕실이 비협조적인 산동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무왕 이후의 주나라는 이전의 왕조와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쳐 예를 표하였다. 주나라 4세인 소왕(昭王)이 기원 전 1047년에 조공했고, 고조선 32세 추밀단군 때(기원 전 909년) 양국 간에 수교를 허락하였으며, 이어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이 주나라를 패퇴시키자 주나라가 번 조선에 조공을 바친 일(기원전 835년)등의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단군)조선은 동북아의 천자국(天子國)이었고 하, 상 주 3왕조는 모두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삼국시대에 훨씬 앞 선 단군조선 시대에 중국 대륙에 우리겨레의 한 갈래가 큰 나라를 세웠으니 이 나라가 건국자의 성씨를 딴 서국)은 36개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광활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주나라를 망국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주(周) 나라 초기에 백익(伯益)의 후손인 서언왕(徐偃王)때에 이르러 이 서국(徐國)으로 인하여 주나라를 위기에 몰아넣기에 이른 것이다. 기원 전 1263년 단군조선의 아흘 단군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나라가 서국(徐國)의 기원이다. 당시의 서주(西周)와 서국은 주종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고 오히려 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던 서국에 대한 기록에는 ‘주 목왕 말년에 서국 왕이 덕이 있어 인의를 좋아하여 그에게 귀속한 동이 나라가 40여 국이나 되었는데, 주 목왕이 서쪽으로 순행하다가 위덕(威德)이 날로 퍼진다는 소문을 듣고 몰래 초나라 군대를 파견하여 불시에 습격하여 대파시키고 왕을 살해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덕을 높이고 인의를 숭상한 나라는 주나라가 아닌 서국이었는데도 후세의 공자는 존주(尊周)의 대의만을 과장되게 내세운 그의 역사서 춘추(春秋)가 실은 동양 역사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강성한 세력으로 주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 수 있었던 서국이 갑자가 몰락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주나라는 단군조선에게 조공을 바치며 상국으로 받들던 때였고, 모든 동이족의 제후들이 서국의 편을 들고 있었으나, 주나라에서 단군조선에 애걸하여 단군의 증표를 얻어 이들 동이족 제후국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이를 단군천황의 명령으로 존중하여 모두 서국의 반대편에서서 주나라 편을 들어 서국을 공격하자 우리 동이족 동족끼리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전쟁을 포기한 데서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주나라는 동이족이 조금만 소요를 일으켜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단군조선에 값비싼 조공을 바치면서 이를 무마해 주기를 청하곤 해 왔던 것이다.
이처럼 수차례에 걸쳐 조공을 바치던 주나라에 대하여 수교를 허락하고 중원의 지배를 승인하였지만 주나라가 동이족을 억압할 때에는 강력히 응징하였다. 중국 산동 반도 남쪽에서 양자강 북쪽에 이르는 지역에는 서이(徐夷)와 회이(淮夷)가 살았고 이 지역에 주나라 제후를 파견하여 봉한 일은 없었다. 춘추시대 말기까지 항쟁하던 회의와 서이는 결국 전국시대에 초나라에 흡수되고 말았다. 천손(天孫)의 나라, 그리고 봉황을 통해 하늘의 뜻을 전달 받아  그 뜻대로 살던 광명의 우리 한(韓) 겨레가 살아 온 옛 모습의 일부를 되새겨 보았다
 우리가 반드시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우리 삶이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며,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된다는데 있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될 때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며,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이 있을 수 없다.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있는 과거이며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역사를 모르는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역사를 알아야 하는 필연적 당위성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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