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고산(孤山) 윤선도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한 오우가(五友歌). 이는 고산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편(白眉篇)이다.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하는 서시와 끝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 버디 몃치나 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 박긔 또 더야 머엇리.” “쟈근거시 노피 떠셔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명(光明)이 너만니 또 잇냐, 보고도 말 아니 니 내 벋인가 노라.”로 되어 있다. 연이은 부분을 포함하면: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리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빚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구나
 조(좋)코도 그칠 이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의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라고 끝을 맺는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시문에 능한 학자로 널리 알려진 윤선도의 간략한 발자취를 보면: 해남 윤씨(尹氏)인 호 고산(孤山) ·윤선도는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상도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그의 약사이다. 
 인간이 아닌 자연을 벗하며 살아간 그의 모습을 위의 오우가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오우가의 벗들 중에서는 무생물인 수. 석. 월(樹. 石. 月)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지닌 송. 죽(松. 竹)도 있어 잘 조화된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제 이 다섯 벗들 중 그 생명을 지닌 송. 죽(松. 竹)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 일세’ 애국가에서 보여주듯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문화이자 기상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가 선산(先山)에 가서 아들 몫으로 소나무를 심었고, 딸을 낳으면 집 근처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많이 남아있는 것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이 보호한 덕분이다. 조선 왕조 때 산마다 봉산(封山)을 만들어 소나무 벌채를 엄하게 금한 이유 중 하나는 배를 만들 목재를 얻기 위해서였다. 소나무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엄동설한의 역경 속에서도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하는 굳은 기상, 절개, 의지, 장생, 견정(堅貞)함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솔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마음 산책을 하였고, 임산부는 소나무 아래에서 솔바람 태교(胎敎)로 마음을 다스렸다. 소나무에서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많이 활엽수의 배로 방출되어 삼림욕에 좋다. 우리 조상들이 소나무 꿈을 꾸면 벼슬길에 오를 것으로 믿었고 전통 혼례상에는 서로 굳은 절개를 지키라는 뜻으로 반드시 소나무와 대나무를 꽂았다. 조선 시대에 집 주변에 송죽(松竹)을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俗氣)를 물리칠 수 있다하여 많이 심었다. 특히 제의(祭儀)나 의례를 지낼 때에는 금줄에 소나무 가지를 꿰어 잡귀와 부정을 차단했다. 아이를 출산했을 때나 장을 담글 때는 금줄에 솔가지, 숯, 고추, 종이 등을 끼웠고, 정월 대보름 전후에 소나무 가지를 걸어놓는 것은 부정을 물리치는 정화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 소나무의 꽃말은 ‘동정, 영원불멸, 절개, 불로장생, 자비’이다.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특성으로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를 이룬다. ‘대쪽 같은 사람’이 말해주듯 그 사람의 성격과 인품으로 불의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사람을 가리킨다. 마을을 수호하는 신간(神竿)으로 대(竹)로 만든 것이 솟대이다. 굿의 재차(第次) 중에 대를 사용한 ‘대(神竿) 내림'신의 강림에 대한 믿음의 표상이고 우리민족 명절인 설날에는 새벽에 문 밖에 대나무를 세워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풍속도 있다. 대나무는 오래 전부터 잎과 줄기. 뿌리는 물론, 새싹까지 모두 약재나 음식의 재료로 쓴다. 죽순이 땅 위에 나오기 전에 캐 낸 것을 동순(冬筍) 또는 포순(苞筍)이라 부른다. 캐 낸 죽순은 햇빛을 못 보게 하는 것이 좋다. 죽순은 소갈(消渴)에 좋고 눈을 맑게 하고 열기를 없애고 각기(脚氣)에도 좋다. 고죽엽(苦竹葉) 차는 막힌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며, 대나무 새순을 음지에 말려서 잘게 썰어 만든 석죽차(石竹茶)는 화병(火病)을 다스린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민족과 삶을 같이 해 온 송죽(松竹)은 앞으로도 갑자기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대나무는 그 쓰임새가 줄어들면서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그 서운함만 금할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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