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태조’라 하면 흔히 나라를 세운 왕으로 생각하고 언 듯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라면 고려태조(王建)와 조선의 태조(李成桂)가 있다. 상식적으로 틀린 답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송 태조(趙匡胤), 명 태조(朱元璋)와 같은 중국 왕조들의 선례에 따라 태조라는 시호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주 틀린 생각이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거느리는 왕 중 왕이니 황제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들의 변방 소국이었으니 황제의 나라래야 일본의 횡포를 앞둔 고종황제의 선언적 절규로 밖에 볼 수 없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고작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또한 근원적으로 고쳐야 할 생각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른바 한사군이 우리의 중심부인 평양에 수 백 년 동안 존치됐다고 하는 그 때의 얘기로 돌아가 본다. 당시 후한(後漢) 순제 때에 촉(蜀) 땅 곡명산(鵠鳴山)에서 도를 깨쳤다는 장릉(張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부서(符書)를 지어 사람의 병을 고치고 못된 귀신을 쫓는다고 백성들을 홀리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그의 입도자(入道者)에게 곡식 다섯 말을 바쳐야 한다는데서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부르기도 했다. 그 세력은 장형(張衡), 장로(張魯)에 이르는 삼대에 이르러 한중(漢中)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또 동시대에 장각(張角)이라는 사람은 학업을 닦아 벼슬길에 오르려고 하였으나 관리에 뽑히지 못하고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어느 날 산 속에서 한 늙은이를 만나 태평요술(太平要術)이라는 책을 넘겨 넘겨받았다. 그가 바로 삼국지의 초반을 장식한 황건적의 거두이다. 이 시대에는 장 로, 장 각 만이 아닌 수많은 도적 패 무리들이 들끓고 궁에는 환관과 외척을 포함한 간신배들이 날뛰는 시대였으니 왕조를 온전히 유지하기도 어려운 후한이 무슨 능력으로 멀고 먼 대동강 유역에 군대를 몰고 올 능력이 있었겠는지 이치상으로도 말이 안 된다.

 한국, 중국, 일본 역사를 통틀어 ‘태조’라는 묘호를 처음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흔히 태조라는 칭호는 국가를 세운 사람에게 붙여지는 묘호인데 건국자를 태조라 칭한 것이 중국에서는 송, 원, 명 청이니 고구려에 비하면 한 참 후의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늘 빼 놓기 쉬운 인물이 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단군이고 이어 5세를 더 이은 졸본부여가 주몽의 대에 이르러 고구려로 국호가 바뀌고 그로부터 4세를 더 이은 다음 6대 황제 때에 나라를 열었다는 의미의 태조라는 묘호를 올리게 된 것이다. 고조선이 망하기 전 고조선의 한 지역인 번조선(지금의 북경 등 중국 땅)을 한 때 차지했던 위만이 전한에게 망하고 일시 그들의 통치기구를 설치하려 했으나 부여의 반격에 밀려 물러가 버리는 등의 수난을 겪던 고(단군)조선의 옛 땅을 거의 회복한 다물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묘호가 태조(太祖)인 것이다. 바로 그 고구려의 5대 황제 태조태왕(기원후 53-146년에 이르는 93년간 재위) 때에 후한과 숱한 전쟁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면서 산동지역 아래까지 세력을 뻗쳐 대륙의 맹주로 자리 잡으면서 독자적 연호를 쓰는 황제 국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태조란 중국을 포함한 변방국들의 조공을 받는 황제(종주) 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태조왕의 고토회복에서 주된 목표는 옛 조선 현토군의 완전한 회복이 그 목표였다. 발해만을 따라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던 고구려는 후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해군을 이용하여 산동 반도의 아래에 자치국으로 남아있던 소국들을 병합한 후 후한을 상대로 대대적인 고토회복 전쟁(105년)을 벌이게 된다. 후한의 옹인 화제가 병으로 눕자 외척이 득세하여 환관들과 싸움이 벌어지는 등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는 이 틈에 요동의 6개현을 점령하였다. 121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 태수 오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의 변경지역을 침입해 왔으니 태조태황의 아우 수성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성의 군사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고구려 군을 향해 밀려들었고, 고구려군은 이들 한 군을 변방 깊숙이 끌어들였다. 군사적인 우세만 믿고 지형에 어두웠던 한 군이 고립되어 있을 동안 고구려는 별동대를 이끌고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쉽게 점령하면서 후한 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고 빠지는 전력으로 한 때 물러갔던 고구려가 선비 군과 연합하여 다시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자 요동태수 채풍이 무너지는 한 군을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속수무책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이어서 마한과 예맥의 기병과 연합하여 현도 성을 포위하고 함락을 눈앞에 두었으나 부여왕자 위구태가 고구려군의 후미를 공격하는 바람에 철수하였다. 그 후 한 동안 고구려는 현도를 공격하지 못했다. 태조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고 내정에 불안의 조짐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조황제 때의 기록에 그 정복지를 ‘동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동해가 아니고 현재 중국에서 부르고 있는 황해인 중국 상해 남쪽 바다를 가리킨다. 당시(후한)의 중국인들은 요동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를 발해라 불렀고 산동 반도에서 상해까지를 동해라 불렀으며 그 아래를 남해라 불렀고, 다만 상해에서 복주(대만) 까지는 동해와 남해가 겹치는 부분이다. 후한지에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함은 이 그 근처가 고구려 땅이었음을 말해준다. 전통적으로 한족과 선비족 등 내륙지역 출신들은 해전에 약했다. 이에 비해 동이족은 상대적으로 해전에 강했다. 동이족은 원래부터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바다의 흐름에 능했고, 조선술도 발달되어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은 고구려는 한 군에 비해 수군이 강했고 해전에 능했다. 한의 수도가 진령 산맥에 둘러싸인 내륙지인데 비해 고구려의 수도는 발해에서 멀지 않은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로도 말해준다. 이처럼 해전에 약했던 한 군이 발해와 동해의 연안지역을 고구려에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점령지를 태조황제가 수차례에 걸쳐 순행하였다. 고구려는 뛰어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산동 반도는 물론이고 양자강 아래쪽의 상해나 복주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태조시대 당시 지금 중국의 해안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고구려는 이 위용 있는 황제 국임을 스스로 ‘태왕(太王)’으로 호칭하였다.

 우리는 걸핏하면 한자(漢字)를 중국에서 수입했다느니 모든 면에서 앞선 중국문화. 문명을 수입했다느니 하는 등 자신의 것을 버리고 주변의 큰 세력에 쓸려가려고 하는 사대모화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일상화 된 자화상이 된지 오래다. 오랜 세월 국경을 맞대고 살아 왔으니 상호 문명이 교환되고 융화된 것 까지는 당연하지만 우리의 본래 모습마저 잃어가면서 까지 여서는 안 될 일이다. 
 '동은 바다에 면해있고, 북은 흥안령이요, 서는 하북성 영평 부, 난하 하류에 이르고, 연주와 청주 즉 북경과 산동지방에 접했으며 남으로 한수(漢水)에 이르렀던 단군 조선의 옛 땅의 회복을 필생의 과업으로 했던 고구려의 태조태황(왕)의 다물 정신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하고 후세대에게도 반드시 전해야 할 정신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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