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일정시대에 태어나 ‘50’년의 한국전쟁(6.25)을 격고 지금 생존하고 있는 노년층은 점점 줄어들어 희귀 연령층이 되어가고 있다. 이 바쁜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이라고 하고 한 날 켸켸   묵은,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옛 얘기나 하고 있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매우 소중한 교훈들을 무시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과거의 연장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재 또는 미래란 늘 ‘불확실’이라는 사실 말고, ‘확실’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현재와 미래를 헤쳐 갈 때 눈앞에 ‘확실’을 보장해 줄 수는 없더라도, 불확실과 그 불확실에서 오는 불안감을 최소한으로 줄여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바로 제각기 현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거나 자신의 지나온 인생경험을 되돌아보고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을 빼고는 없을 것이다. 화려했거나 되돌아 가 보고 싶은 과거도 있고 영원히 기억 또는 기록 자료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 모든 것들, 이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버릴 일이 아니라 거기서 반드시 보배를 건져 올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연령과 계층에 상관없이 공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전쟁, ‘전쟁’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고 창피한 전쟁, 그것이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이다. 전쟁 후 청에서는 궁중의 시녀로 조선의 처녀를 요구했다. 조선은 매년 백 명의 처녀를 청으로 보냈으며, 청은 그 일부를 시녀로 쓰고 나머지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보낸 처녀가 십년간 수천 명에 이르렀다. 청의 명을 받은 조정은 처녀를 조달하지 못해 관기, 기생, 천민들을 보냈으나 이를 알아차린 청이 호통을 치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포도청에서는 아무나 눈에 뜨인 처녀들을 잡아 보내니 전국이 곡성으로 뒤덮였다. 처녀들은 안 잡혀 가려고 머리를 깎거나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서둘러 조혼을 했다. 처녀들 외에도 무려 육십만이나 되는 포로를 데려 갔고, 은과 돈, 곡식은 물론 젊은 유부녀 까지 끌고 갔다. 그들이 이십만 명이 넘는 여자들을 끌고 간 데는 여자 포로들의 부모에게서 몸값을 받아내기 위함이었지만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라 속환 금을 내고 풀려난 경우는 별로 많지 않고, 노예로 살다가 목숨을 걸고 청에서 탈출하여 고국 땅을 밟은 여인들은 몸을 더럽혔다며 손가락질하는 가문과 남편들의 반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는 일이 빈번했다. 이를 막기 우해 조정에서는 홍제동(弘濟洞 널리 구제하는 동네) 개울에서 더렵혀진 몸을 씻는 것으로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들 환향녀(還鄕女)들에 대한 대접이다. 
고종 때 조선 조정이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친 러 세력 이 정권을 잡자 일본은 직접 러시아와 사우기 보다 친 러 세력의 중심에 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작당하였다. 그 명분이 궁색하자 대원군을 내세워 자기들은 슬쩍 빠져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조선의 궁 안으로 난입한 일인들은 군내대신 이경직을 죽이고 가지고 간 사진을 대조하여 명성황후를 찾아낸 뒤 황후와 궁녀들을 모두 살해했다. 일본 공사 미우라는 증거인멸을 위해 황후의 시체를 태웠다. 숱한 정치적 역경을 치르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여기까지 헤쳐 온 여걸이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중략> 위안부들이 고기가 먹고 싶어 운다며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마시도록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이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 이었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 이었다고 한다. 매독 감염을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그리하여 1933년 12월 1일 한 여성이 죽었다. 다음해 2월에는 매독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여자를 즉사시킨 달군 쇠막대에는 살점이 달려 나왔다. ‘맨 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에는 모두 살려 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를 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되풀이 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우를 했다. 함경남도 풍산 출신 정옥순(‘20년생 鄭玉順) 할머니의 증언 중 일부이다

 애국할 줄 모르고 나라 지킬 줄 모르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일을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 같아 차마 입에 담거나 필설로 표현하기조가 끔직하고 치가 떨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사실대로 몇 가지 열거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끊기 직전에 흘린 성 완종의 눈물에 무슨 뜻이 담겨 있으며, 국회의원 후보 낙천에 흘린 눈물 속에 한 방울이라도 나라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집안에서 밥그릇 놓고 싸우면서 애국 없는 나라가 어떻게 남의 종이 아닌 나라로 존속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도 영국의 의회정치 활동을 살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방의회 의원이나 국회의원 모두 월급(세비)제도 같은 것은 없고 회의가 열리는 날 당일 차비와 일당 정도가 지급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주민들 중 좀 괜찮게 사는 사람 중 교양 있고 존경할만한 사람의 등을 떠다 밀어 각급 의원이 되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주민들을 위한 공무에 헌신했다는 영예가 주어질 뿐 돈이나 생계와는 무관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 하니 우리라고 그러지 못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싶다. 
 우리 인류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구원의 기로 이끌어 온 큰 종교의 창시자들은 세계가 낳은 최고의 인물로 받들어 질 훌륭한 인물들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의 제자나 신도들은 때대로 위대하다거나 선량하다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큰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가 있어 그냥 대충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이천만 이상이 종교인구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의 기록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고결하게 해 주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마치 동물처럼 취급한 예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니라 암흑 속으로 인도하려고 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옹졸하게 만들어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여졌지만 도리어 종교의 이름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고 테러 등 온갖 죄악이 자행되었다.
 이런 일들이 남의 일 아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니 이런 일을 바로잡아나가자는 얘기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불교계는 자정(自淨)과 선(禪)에 집중하여 세간에 난무하는 ‘땡땡이’라는 비 아 냥을 잠 재워야 한다. 더불어 난장판 중에서도 난장판인 정치에 간여하고 정치인들에게 표를 볼모로 하는 위협수단을 행사하거나 범법자들을 보호하는, 보기에 꼴사나운 짓은 당장 그리고 영원히 그만 두어야 한다.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난무하고 있는 만자(卍字=swastika) 붙은 점집도 사라져야 한다. 액막이나 점술이 문제가 아니라 불교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라 해서 별로 예외일 것도 없다. 고액 헌금을 권장하거나, 헌금의 액수가 마치 신앙의 척도라도 되는 것처럼 신도들의 신앙 자체에 점수를 매기는 성직자들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하느님이 신도를 찾아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교회(ecclesia)의 본질을 잊지 않고 있다면, 교회라는 곳이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진대, 사실상의 세력 확장과 교회 재산 늘리기 작전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으리으리한 교회(성당)의 건물이며 세월과 더불어 더욱 더 늘이는 데만 기를 쓰고 있는 모습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건지 묻고 싶다. 나는 공직의 현직 재직 시 불교의 사찰, 성당, 교회, 변호사, 의사 들을 방문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서비스업 부문의 소득을 추계하려고 무척이나 정성을 들여 접촉을 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였다. 이들이 아닌 농민, 근로자, 가정주부, 사업체, 공장주, 시장 상인, 학생 등 어느 계층의 누구에게도 응답을 거절당해 본 일이 없던 일이기에, 이른 바 사회의 가장 식자층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가장 암적인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 소득이 생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입에 밥은 어떻게 들어가며, 자녀들의 학비는 무엇으로 대는지, 이렇게 양심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무슨 낯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술 자문을 하며, 말재주로 돈을 벌고, 불법(佛法)을 독송하고 가르치며, 강단에서 설교 하는지 그 속이 궁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우리 모든 국민 쪽을 돌아본다면 어찌된 일인지 무조건 반대하고 반항하고 떼쓰고 피  흘리는 폭력시위에 너무 잘 길들여진 우리 모두의 모습에서, 때로는 그 억울함을 확실하게 들어 주어야 할 일도 적지 않겠지만, 그냥 막무가내 생떼인 경우가 너무 많은 모습에서 주인정신이 사라져버린 우리의 한심한 자화상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정말 이러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나라일수록 국가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재기불능의 상태로 망해가는 속출하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정치인, 일반국민 모두 세금을 내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비틀어 짜내려고 온갖 행태의 합법을 가장한 온갖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일은 너무나 일상화 된 불감증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어느 나라에도 부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는 없다. 정승같이 살기 위해 개같이 긁어모을 때 인심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부자 된 후에 구두쇠 노릇을 해서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서구인들의 부(riches)란 왕의(royal), 바른(right), 권리(rights), 바르게 하다(rectify), 규칙(regulation), 합법적인(regal), 정권(regime) 등 동 계열(同 系列) 어군이 말해주듯 올바르다는 뜻에서 권위와 권력, 합법, 그리고 왕(정)권으로 까지 존경의 대상이 본질이고, 그것이 언어 속에 녹아 있다. 거기에 비해 우리들의 부자란 그 부자 되기 까지 과정만이 아니라 영원히 그 부를 놓치기 싫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 부를 대물림 하는 것이 이미 상식화 된 일이고, 정치인들 또한 이들 부류에 들어가니 끼리끼리 못된 짓만 서로 돕는 공생관계가 형성되면서 못사는 사람에게는 디디고 일어 설 기회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으로 몰아가고 있는 게 또한 상식화 되어있는 우리 사회다. 외국인들이 다 할 줄 아는 더불어 살기가 안 되는 우리사회가 부자를 존경할 수 없는 사회임을 인정한다면 ‘부자 존경’은 바로 그 부자들의 몫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 빈부격차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래도 그 밑바닥에는 늘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큰 몫을 안겨주겠다는 의지가 자리 잡아야 할 자리에 ‘빈익빈 부익부’가 요지부동으로 차지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가정, 각종 모임, 대중 매체 등 어디로 가나 ‘건강’ 이야기가 떠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건강을 지키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렇게 잘 지켜낸 건강한 몸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모든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사회의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렇게 이기심만 가득한 채 애국할 줄 모르고, 혈안이 되어 재산이나 긁어모으고, 생떼나 쓰고, 못된 짓 하고도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 가끔씩 빌면 그만이라는 바탕의 엉터리 종교행위며, 이런 저런 병폐들에 고발이 없다면 국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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