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많은 사람들이 가끔씩은 도깨비 방망이, 도깨비감투를 얻어 돈벼락이라도 한 번 맞아 봤으면 원이 없겠다는 소리를 한다. 허황된 소리라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구석도 있다. 바가지라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옛 이야기 속의 흥부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밀거니 다리거니 슬근슬근 박을 툭 타 타노니 오색 채운이 일어나며 청의동자 한 쌍이 나오는지라 흥부 깜짝 놀라 하는 말이 ‘팔자가 그르더니 이것이 웬 일인고, 박 속에서 사람 나오는 것 보아라. 우리도 얻어먹을 수 없는 데 식구는 잘 보태인다.’ 그 동자 거동 보아라 봉래산 학 부르는 동자 아니면 필경 천태산 약 캐던 동자로다. 좌수에 병을 들고 우수에 대모반을 가져 눈 위에 높이 들어 흥부전에 드리며 하는 말이 ‘은병에 넣은 것은 죽은 사람을 불러내는 환혼주요 옥병에 넣은 것은 앞 못 보는 소경 눈 뜨이는 개안주요 금전지에 봉안한 것은 말 못하는 사람 말 하게 하는 능언초와 곱사등이 반신불수 절로 낫는 소생초와 귀머거리 소리 듣는 총이초요 이 보에 사인 것은 녹용, 인삼, 웅단, 주사 각 종이오 이 값을 의논하면 일만 냥이 넘사오니 매매하여 쓰옵소서’. 흥부 마음이 너무 황홀하여 연고를 부르려하니 동자 벌써 가버리고 없는지라 흥부 거동보소 춤을 추며, ‘얼시구 좋을시고 좋다. 지화자 좋을시고 세상사람 들어 보소 박속을 먹으려다 금시발복 되었구나 인간천지 우주 부자 장자들이 재물이 많다하나 이런 보배는 없을지니 같은 가진 부자 어디 또 있으리.’한다. 생명을 건진 제비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물고 온 박 씨를 심어 그 박이 주렁주렁 열리고, 먹을 것이 없으니 그 박의 속을 긁어서 국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흥부 부부가 양 쪽에서 톱질을 하여 그 첫 박 속에서 청의동자가 가지고 나온 선물 꾸러미 이야기다. 삶에 찌들 때 대박의 꿈에 날개를 붙인 훙부가 되어 나 홀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 주지도 않으면서 아무에게 들키지도 않고 공해가 일으키지 않는 에덴에서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처럼 박은 그 담백하고 청아한 모습으로 우리 조상들과 함께 해 왔다. 이 박에 톱질을 해서 쪼개면 그 속에 씨와 함께 있는 속의 내용물을 긁어내어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었다. 쪼개진 박의 속을 긁어내고 난 것이 바가지인데 닳거나 깨질 때 까지 손때를 묻혀가며 주로 그릇(用器)으로 쓰이지만, 다른 여러 가지 용도에도 쓰이니, 그 중 한 예로 ‘바가지 긁다.’ 또는 ‘바가지 쓰다’에서처럼 지금도 자주 쓰이는 말이 있다. 밑바닥이 둥글어서 여간해서는 바닥에 세워놓기도 어려운 불편한 바가지 대신 얼마든지 좋은 그릇들이 많아진 요즈음, 구하기조차 어려워진 그 바가지, 설령 그 바가지가 있다한들 그 바가지를 박박 긁어 소리를 내거나 머리에 뒤집어 쓸 일도 없으련만, 그 친근했던 박이 생활 언어 속에서만 그 자취를 남겨 둔 것이 ‘바가지 긁기, 바가지 쓰기’이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많은 시끄러운 소리들이 무질서하게 귀를 괴롭힐 때 우리는 소음이라 하고 이러한 무질서한 소리들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들려올 때 음악이라고 한다. 이들 소음 중에서도 바가지를 박박 긁어대는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고 특히 집 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쉴 새 없이 읊어댈 때 ‘바가지’ 긁는다고 말한다. 이때의 바가지란 원래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나 그 밖의 액신이 문 밖에 왔다가 귀에 몹시 거슬리는 바가지 긁는 소리에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 그 시작이다.
 또 바가지를 쓴다는 말은, 옛날 시골 장터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야바위꾼이 구경꾼들에게 돈을 걸게 하고 제비뽑기를 하면서 당첨 제비가 든 것을 바가지 밑에 넣어 다른 빈 바가지들과 이리 저리 천천히 섞으면서 구경꾼들에게 맞혀 보하고 하는 데서 이다. 확실히 눈여겨 보아둔 바가지에 당첨 제비가 든 것으로 알고 짚었건만 바가지를 뒤집어보니 꽝이다. 그러니 바가지 쓰면 돈 이 털렸다는 말일 수밖에 없다.
 바가지 긁는 소리란 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할 일이고, 바가지를 씌우지도 쓰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배울 때 흔히 어느 왕 때 삼정(三政)이 문란 했다느니 하는 말을 만나면서도 그저 그런 게 있었나 라고 어물쩍 넘겨버린 대목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으로 이루어진 삼정이야말로 정부라는 공조직이 노골적으로 가련한 백성들에게 혹독한 바가지를 씌우는 수단이었다. 전정, 군정 모두 썩어 있었지만, 상정  중 하나인 환곡의 바가지 씌우기 실상을 이 바가지에 실어 고발하고자 한다.
 환곡이란 원래 농민들이 곡식이 떨어졌을 때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 후에 받아들이는 제도였으며, 법으로 정해진 이자는 1할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원래의 이 좋은 제도가 지방의 탐관오리들이 사람 잡는 착취 수단으로 변한 것이 이 제도다. 지방 수령들은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농민의 환곡 탕감을 허가받은 뒤에 농민들에게는 그대로 받아 착복하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게다가 이자를 마음대로 올려 환곡이 구호 곡 아닌 생사람 잡는 수단이 되는 것이 일쑤였다. 그렇다면 환곡을 안 쓰면 될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년에 환곡을 썼던 사람이 올 해 쓰지 않으면 강제로 떠맡기니 곡식이 남아돌아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 고리 이자를 물고 나면 식량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이 환곡을 내어 줄 때 곡식 속에 왕겨를 섞어 양을 늘리거나, 물에 불리는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였고, 그 악역은 아전들이 도맡았다. 그 뿐이 아니라 환곡을 강제로 안기면서 정부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쌀값이 싼 다른 지방에서 사서 주었고, 받을 때에는 이자 외에도 쌀 값 차액까지 챙긴 것이다. 심한 경우 환곡을 주지 않고서도 주었다고 문서를 작성한 후 강제로 이자까지 받는 파렴치한들도 있었다. 농민들을 유랑민 또는 반란군으로 내몬 것이다. 이 배경을 기반으로 19세기 중반 전국적으로 민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조선 멸망으로 이끈 주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이란 이런 인간답지 못한 쓰레기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어디 가서 자기 조상이 조선시대 양반이었다고 자랑한다면 바로 이런 작태들이 자랑꺼리란 말 밖에 안 됨을 알고나 할 소리다.
  
 역사란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채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밝혀 거울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옛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도 이런 못된 속마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그냥 흘려버린다면 역사의 기록이란 의미가 없다. 국가가 할 일은 다른 무엇 보다 애국할 구심점을 정립해야 하고 이를 위한 구체성 있고 실체와 실천성이 뒤따라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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