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안 읽고, 안 보고 사색하니 행복하여라

정 종 암
시사평론가
 신문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신문에 글을 쓴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더 나아가 TV도 안 본다. 각각 12~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시류를 읽는 데는 둔하지가 않으며 언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만약 둔하다면 어떻게 시사적인 정치평을 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TV와 멀어졌던지 2년 전엔가 런던올림픽 개최조차 잊고 살았듯이 미미한 역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안 읽고, 안 본다는 것은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랬던가? "신문을 읽지 않고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인간은 남이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는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잊는다"고『파우스트』저자답게 혹평을 날렸다. 필자가 비평가로서 '너도나도 밤나무'처럼 날뛰며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영혼 없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작품성에 혹평을 가하듯이 말이다.

 그렇다. 신문을 안 보니 마음이 편하고 주변이 깨끗해 고요 속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어 좋다. 아침을 열자마자 조간신문을 받아들 때 그러할 시간의 빼앗김에서 자유롭다. 신문지의 잉크 냄새를 맡으며 깨알 같은 글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이 없단 사실도 하나의 행복이다. 미국의 수필가이며 시인이자 철학자였던『월든; 숲속의 생활(Walden; or, Life in the woods)』의 저자 소루도 단순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한 이답게 "신문을 읽지 않은 자는 행복하다. 이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일간지에 기고할 때는 조간 기준 이틀 전 오후 4시까지 마감을 요구한다. 익일에 배포될 조간은 금일 저녁 8시가 되면 끝내고 청와대와 광화문에 배포된다. 이 시간 대 대기업들은 그 신문을 거머쥐기 바쁘다. 늦은 밤이면 서울역을 통해 각 지방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아침에 독자를 만나는 구조다. 서울 발행 기준 주간신문은 통상 열흘 전에 원고 마감을 독려한다. 지역신문과 인터넷신문이 아닌 신문은 원고 매수를 제한한다. 각 언론사마다 조금씩은 다르나 필자가 겪은 바로는 보통 10~12매 정도다. 그 매수에 맞추려는 어려움 아닌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기에 기고는 인터넷 매체가 편할 때가 많다. 왜일까? 통상 데스크급 필진의 기고는 교정하는 일이 거의 없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오탈자나 문맥의 매끄러움까지 필자의 몫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즉 얼굴 화장 격인 메이크업(Make-up)의 일부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능맨(萬能人)으로 생각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실수가 가끔 난다. 그 실수를 독자들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다. 필자로서는 애석함이 따른다. 활자화돼 독자들에게 배포되었기에 어떤 후속 대책을  세울 수가 없는 낭패를 겪는다. 모든 글에는 탈고가 어렵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만약 페이퍼신문이 아닌 인터넷신문이었다고 가정하자. 급히 편집국으로 연락해 정정할 수 있기에 기고는 후자가 편한 편이다.

 그렇다면 남들이 신문을 보고 TV를 시청할 때 무엇을 할까. 사색하고 책을 읽는 편이기에 외출 시는 항상 가방이 함께 따른다. 그 속에는 자투리 시간을 아끼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읽을거리를 넣을 가방이 함께 하지 않으면 허전해 외출을 못할 정도이다. 간혹 가방이 친구가 안 될 때도 이러한 습관을 아는 지인들은 회합을 파할 때 그날따라 없는 가방을 챙겨주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면이 여러 문학 장르에 등단한 지도 모른다. 문학인이면서도 작가나 시인 따위는 현재로서는 거부한다. 폭이 넓지 않지만 작은 독서의 힘이 있었기에 여타 분야에도 논제를 불문하고 거의 전방위적으로 글을 쓰는 편이다. 여기에다 대학(원)에서 다학문(多學文)을 탐구한 특이한 이력이 더하지 않을까? 그러나 메모하는 습관은 없다. 그러기에 청와대에 모인 각료들이 수첩을 꺼내들고 메모하는 제스처가 가끔은 가증스럽게 보일 때가 있다.

 필자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를 다니고 세칭 출세학에 능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착상한 글월에 대해서는 1박2일 정도는 머리에서 맴도는 필자만의 자신감이 있다. 그렇다고 두뇌가 명석하지 않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론에서 벗어나 체험에 의해 글을 쓸 때도 많다. 언젠가 '로비의 달인'인 굴지의 대기업 건설현장에 주말을 틈타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이틀간 잠복 아닌 위장 취업(?)끝에 월척을 낚아 칼럼화한 적이 있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는 물론 현장의 많은 취재원에 의해서 어느 언론도 건드리지 못한 부정의는 예리한 칼날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관계기관과 함께 혼이 났었다. 작업복 입은 훤칠한 키의 필자에게는 용서가 없었다는 후문이었다. 당연하다. 비판에 있어 자신의 깨끗한 삶이 앞서면 글에서도 당당함이 묻어나는 법이다.

 타자(他者)도 교만은 금물이다. 현명한 이나 단체는 비평가의 파괴적이 아닌 생산적인 비판은 받아들인다. 언론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광고 수주와는 상관없었지만 메이저급이 아닌 그 중견 언론사는 정기적인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러하듯이 재주는 곰이 부리고 과실은 언론사가 독차지할 때가 많다. 정의감이 앞선 행동이었지만, 맑은 영혼을 심고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이 씁쓸할 때가 있다. 세간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도 남길지언정 황금을 우선시하는 수전노들을 만나면 피곤을 안긴다. 반면에 강한 필력은 매사 당당함의 자존심이 어깨를 같이 한다. 이게 인격의 바로미터(barometer)일 수 있고 힘이기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유수한 문언에는 아직도 부족하기에 부러운 점을 숨길 수 없다. 혹자들의 모방은 자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가 바탕이 안 된 말이나 글은 곧 허물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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