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모든 것이 갖추어진 지금의 세상이야말로 과거 어느 때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금 같은 말세는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론 또는 비관론을 쏟아놓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은 너무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 방식의 통치체제만 해도 그 연륜은 그리 길지 않고, 그나마도 피 흘려 투쟁해 가며 쟁취한 결과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목할 만한 저서가 나왔으니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이라는 경제학 서적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 당시 대부분의 논리가 종교적 교리에 휩쓸려 혼란한 상태에 있는 것을 과학적 탐구 정신으로 경제 속에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 복잡한 작용이 어떤 일정한 자연법칙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했고 이 법칙은 완전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의 사조인 모든 사물의 법칙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던 틀을 깨고 과학적 방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원래는 만인이 모든 면에서 평등하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육체적, 지능적, 도덕적 차이가 당연하였으며 성장과정이나 교육정도에 따라서도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인간이 실제에 있어서의 불평등을 용인했고 단지 인간이 평등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에 근거하여 각자가 의회에 보내는 대표자를 선출할 때 반드시 한 표를 던질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귀결 된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에게 투표권은 주어졌지만 여전히 특별히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 권리로 주린 배를 채워주지도 못했고, 투표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국정에 참여할 일이란 극히 드물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권력의 소유자란 국민들의 질곡(桎梏)을 미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패거리로 집단이라 해도 이렇다 할 변명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경제력을 동반하지 못하는 투표권만으로는 환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경제적 평등만을 내세우면서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한 가난으로 내몰려 그 빈곤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후세대들에게 대물림 하는 것으로 귀결 될 것이 뻔한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일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시장 경제)’은 부의 평등한 분배 보다는 경제활동의 자유와 기회균등에 더 무게가 있었다는 데서 제도나 경제활동 방식만으로는 누구를 탓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일반국민들이 우리의 정치집단에 대해 제도적 모순을 끄집어내기에는 민주주의 보다 월등한 대안이 없으니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 우리의 내부에서 찾아 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 바로 그 모순 덩어리인 정치집단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데서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 마디로 명쾌한 답이 될 해법이란 있을 수 없고 어찌 보면 그냥 추상적이기만 한 ‘또 그 소리’로만 들릴지 모르지만, 아무리 바쁘고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도 약간은 여유로운 공간을 마련하여 민주 시민다운 마음의 양식인 덕성(德性)을 쌓아 가는데 인색함이 없게 하는  습관이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쉼 없는 노력이 그 시작일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서운한 감정으로, 타인에 대한 원한 따위가 생긴다면 모래 위에 또는 흐르는 물 위에 새기듯 금방 흘려보내고, 타인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빚을 졌다면 대리석에 새길 일이다. 결행하지 않은 복수보다 더 영예로운 복수란 없다. 또 그 복수란 급히 먹어서는 입이 델 수 있는, 식혀 먹어야 할 요리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고, 그러한 다양성이 인생살이의 양념이라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슬기로운 사람은 때로 마음을 바꾸지만 어리석은 자는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못 될 때 ‘자유로움’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지기 통제력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열정의 노예가 되어 그 지배를 받는 자는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어느 한 나라의 진정한 재산(富)이란 땀 흘려 일 하려는 부지런한 국민의 수에 달렸음을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나라에 힘이 있기를 원한다면 민초를 잊지 말아야 하고, 나무의 수액이 뿌리에서 올라오듯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명리에 앞서, 책임질 능력이 갖추고 또 그 책임을 기꺼이 감당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은 재주꾼일 뿐이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는 데서 우리 모두가 천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천제란 위대한 인내력의 소산이라는 말이다. 위대한 천재란 약간의 광기도 있다. 바로 그 천재성은 나를 붙잡아 소유하는  주인인 것이고, 내가 소유하는 것은 남들이 말하는 ‘재능’이다. 두뇌훈련 또는 개발을 위한 투자는 낭비가 아니다. 교육이 없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영역이 없는 사람이라면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낫다. 또 나쁜 교육은 무교육 보다 못하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데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될 일이다. 보통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아는 것이 적은 법이다. 우리는 별로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에만 제대로 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훌륭하면서도 빨리 해치운 일이란 좀처럼 없다. 수고와 노동 없이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란 없다. 아무리 게으름뱅이라도 변명은 늘 준비되어 있다. 목적을 바로 세우고 바로 된 목적에 이끌려 갈 때 인생의 의미를 준다. 성공은 목적을 향해 시종일관하는 자세이다. 멀리 있는 것에 목표를 둘 때에도 가까이 있는 것을 경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우리 생애에 어떤 것도 정열 없이 성취된 것은 없다. 우리가 빠져있는 외모 지상주의가 일시적 바람에 불과하다면 그만이겠지만 뿌리 내리거나 굳어진다면 망국병으로 갈 것만 같은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그저 못된 꾐에 빠진 한 때의 유행병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숨은 능력이 썩어 나가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늘고 약한 거미줄도 합치고 합치면 사자도 묶을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일 할 때 능률이 오르고, 또 혼자 힘으로는 대세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공동의 적이 나타날 때 가장 나쁜 사이에서도 결속력이 생기는 법인데, 우리의 정치권 또는 국민 개개인은 큰 적이나 위험 앞에서도 그 나마의 결속력도 실종되어가는 모습이니 안타갑기만 하다. 번영할 때 뽐내기 잘하는 사람일수록 역경에서 위축되기 쉽다.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고칠 수 없거나 불가항력일 때에는 참아내는 것이 슬기다. 짐을 잔뜩 실은 나귀의 등에 지푸라기 하나를 더 얹어도 그 나귀는 쓰러질 수 있고, 가득 찬 잔에 한 방울만 더 따라도 잔이 넘친다. 늘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대개 절제란 육체상의 즐거움을 그만두는 데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절제 없는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실패가 저속한 성공보다 낫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판단을 서두를 때 후회 또한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다. 지혜의 문은 늘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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