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필자는 십 수 년 전에 이탈리아의 로마에 들른 일이 있다. 나를 제외한 우리 일행들은 눈이 뚱그래지면서 연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감탄의 탄성을 내어지르기가 바빴다. 하루도 빠짐없이 세계 각국에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보고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손쉬운 돈벌이를 하는 것 같아 속마음으로 은근한 부러움이 솟아난 건 사실이다. 나중에 구경을 마치고 우리 끼리 자리를 하였을 때 또 그 감탄의 연속 상영, 게다가 이들이 이렇게 위대한 유산을 남길 때 우리 조상들은 뭘 했느냐는 원망 까지 섞어가는 연장전이 시작 되었다. 그러더니 그 감탄사에 한 마디도 보태지 않는 나에게 따지듯 감상을 물어왔다. 나도 그 분위기는 이해하면서 또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단은 그들의 말과 같이 감탄스럽다는 동의를 한 다음, ‘하지만 이 원형경기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이민족 검투사들, 사자의 밥으로 죽어간 수많은 이방인 노예들, 이 거대한 시설물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수많은 인력, 또 이 구경을 보고 즐기는 데 들었던 비용 등을 생각하면, 이런 일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은 우리 조상들이 이들보다 인간적으로 나은 것 아니겠는가’라고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은 내 답답하고 재미없고, 무덤덤한 감각 쪽에만 초점이 쏠려 내 말을 그다지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기원 전 8세기 경 아리아인의 자손이 티베르 강 근처에 있는 일곱 개의 언덕에 마을을 세워 이것이 서서히 성장하여 하나의 도시로 형성되었고, 이 도시가 발전하여 그 세력이 전 이탈리아에 뻗치고 나중에는 시실리 섬 까지 수중에 넣게 되니 이것이 곧 로마의 건국이다. 로마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이웃 부족들을 쳐부수고 점점 세력을 넓혀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도시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큰 나라가 된 것이다. 그들의 초기 통치에는 황제도 국왕도 없었지만 오늘과 같은 공화정치도 아니었다. 정권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소수의 귀족에게 있었고 실제로 나라 일은 원로원에서 처리하였으며, 이 원로원 의원은 선거로 뽑힌 두 사람의 집정관으로부터 오랫동안 귀족인 사람 중에서 임명을 받았다. 그러자니 지배층인 귀족과 평민 계급으로 된 두 계급 간에는 끊임없는 갈등으로 이어져갔고, 전쟁 포로인 이방인들은 노예가 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광대한 점령지의 모든 국민들 모두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마에 사는 시민들로만 이루어진 투표로 집정관을 선정하고 보니 집권자들은 로마 시민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선심을 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마의 승리와 정복은 나라의 부강과 국민생활의 사치를 가져왔다.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는 더욱 더 가난뱅이가 되어 간 것이다. 노예의 수는 증가하고 사치와 빈곤이 병행하였으니 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유층에서는 흥행의 승부로 빈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하였으니, 검투사 노예들은 흥겨워하는 관객들 앞에서 서로 칼질을 하며 목숨을 주고받는 피비린내 나는 오락은 연일 이어졌다. 로마의 질서도 무너지면서 폭력, 학살, 투표권 매수, 그 밖에 온갖 부정과 불법이 줄을 이었다. 이어 로마가 메소포타미아에게 대패하여 어려움에 처했을 때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과 프랑스,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실력자로 개선하였지만 브루터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가 첫 황제가 되어 질서를 잡는 것 같았지만 깊이 밴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세습되면서 점점 사납고 포악하여지자 점점 군부가 세력을 길러 황제의 폐립까지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니, 황제가 이들에게 뇌물을 써야 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일반 서민이나 정복한 지역에서 탈취해 왔다. 또한 노예무역이 되어 동방에서는 로마 군대에 의한 정규적인 노예포획이 성행하였다. 원형극장(콜로세움)에서는 하루에 1,200명이 넘는 노예 검투사들이 황제와 귀족들의 심심풀이 대상으로 목숨을 던져주어야 했다. 로마 사람들은 점점 전투 능력을 잃어갔고 농민들은 어깨의 짐이 너무 무거워 날로 비참하게 되어갔고, 도시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황제는 그들을 쓰다듬어 주어야 했기에 로마 시민에게 무료로 빵을 배급해 주고 무료 서커스를 보여주기도 했으니, 그 대가로 밀가루 공급국인 이집트와 같은 다른 나라의 노예들은 굶어야 하는 참상은 연출하였다. 껍데기만 남은 로마는 이방인들을 징집하여 군을 편성하였지만 그들이 힘써 로마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워 줄 리도 없게 되었으니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후에 신성 로마 제국, 동. 서 로마 제국 등 꼬리 잘려 나간 도마뱀처럼 명줄만 이어가던 로마가 소멸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로마의 약사이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이 수명이 길었던 나라를 로마로 꼽지만 우리에게도 태고 적의 고대사를 제외한 고대 국가 중에 천년을 지켜 온 신라가 있었으니,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일이라 하더라도 조상의 나라 신라가 어떻게 망해 갔는가를 위 로마의 경우와 되짚으며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신라의 49대 경문왕의 딸인 51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숙부이자 실질적 남편이기도 했던 위홍이 죽고, 이어 젊은이들을 궁실에 불러들여 난잡한 행동을 서 슴 치 않는 가운데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중앙 정부에서 이를 진압할 능력을 잃어갔다. 조정이 통제력을 잃어가자 나라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호족들이 조세 납부를 거부하기에 이르러 국고가 텅 비게 되었다. 다급해진 왕이 조세 징수를 독촉하자 오히려 반란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어 곳곳에서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조정의 군사력이 너무 미약하고 보니 반란군의 정벌은 꿈도 꾸지 못하고 수도권의 치안 유지에 급급할 정도에 이르자 반란군들은 그들 간에 서로 세력다툼으로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많은 군웅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쟁투 끝에 서쪽의 견훤과 북쪽의 궁예의 두 세력이 군소 세력들을 모두 정리하였고, 이어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궁예의 뒤를 잇게 되었다. 신라 55대 경애왕에 이르러 왕이 북쪽 왕건의 고려를 적극 지원하면서 서쪽 견훤의 후백제를 심히 적대시하자 견훤이 불시에 경주로 쳐들어 와 왕을 죽이고 56대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후백제에 견훤의 장자 신검과 견훤과의 후계 왕위 계승 갈등으로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부왕 견훤을 내쫓고 왕이 되자 견훤이 고려로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함으로써 천년 사직의 막을 내렸다.   허점투성이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개인의 흥망은 말할 것도 없고, 왕조를 창업하거나 유지하는 일에 늘 흥망이 따라 다니는 일이니, 나라를 몇 만 년이고 지켜 나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지만, 인간사의 실패 사례 또는 망해가는 모습을 되돌아 비추어 볼 때, 그 거울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 일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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