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불교계에서 부처에 귀의한다는 염원으로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독송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부처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남무아미타불’이 과연 그런 뜻을 담고 있는 말인가를 되짚어 보게 되는 데, 이 말이 원전인 샌스크리트어 일지라도 한자(漢字)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소리만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뜻이 담겨있는 것이니, 이를 풀이하면 우선 ‘남무(南無)’가 남쪽으로 가서 찾아보니 구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고, ‘아미(阿媚 慈悲=ami)’란 바위가 활처럼 또는 우리 조상들이 살던 초가지붕처럼 ‘굽은 모양’을 말하고, ‘타불(陀佛)’은 부처가 있는 곳을 의미함이니, 석가가 그토록 애타게 도(道 =ami)를 구하려고 남쪽을 헤매어도 구할 수 없게 되자, 우리 동이 인들이 살던 동이지(東夷地)에 이르러서야 부처를 찾았다는 풀이가 된다. 실제 구부러진 모양이란 ‘고구려’의 ‘구려’, ‘가락국’의 ‘가락’등에서 보여주는 곡선(성곽, 성읍, 골짜기, 골)인 동시에 더 나아가 ‘고리(丸)’ 또는 원(圓)이 되면 곡선의 완성품인 완결을 의미하는 신선의 경지를 의미하기도 하니, 이러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 수련해야 할 의무가 우리 중생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이지에 부처가 있었다는 말은 석가가 성장한 후에 동이 인들이 살던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신강성(新疆省), 서장성(西藏省)등지에서 부처를 찾았고 거기서 불도를 배워 익혔다는 뜻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불교의 발상지인 돈황의 막고굴 속에 용암이 흐르다가 활처럼 휘어진 곳에 석가 보다 수천 년 전부터 있었던 부처가 그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세계의 거성 중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인도의 타고르가 ‘빛은 동방에서’가 바로 그것이고, 신라의 대 학자 최치원이 말한 ‘유불선(儒彿仙)’이 우리 조상의 나라 환국과 배달국에서 외출 나갔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러기에 잠시 외도하고 돌아 온 불교를 따뜻이 맞아들인 우리 조상들은 그래도 불교가 설파하는 그 본산인 ‘배달국(桓雄)’이 그 가르침의 주인임을 명시하여 부처님을 모시는 본당에 ‘환웅’의 웅(雄)을 딴 대웅전(大雄殿)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르게 되니, 배달국 환웅의 통치권 하에 있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금 중국 땅에 있는 사찰들의 본당을 모두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신라 초기의 왕명 중 ‘차차웅(次次雄)’이 있는데 이 또한 제사장인 스승과 통치권을 겸한다는 뜻이고, 이 차차웅에서 ‘차충’, ‘사숭’, ‘스승’에 이르면 지금의 ‘스님’ 또는 ‘스승(恩師)’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웅(雄)’이 수컷이라는 성감별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전파하는 스승이라는 말이다.

 보름달처럼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 대지와 같이 의지가 굳고 냉철할 뿐 더러 연꽃처럼 마음이 순결한 위대한 부인 마야부인(摩耶婦人)의 배속에 들었던 아이가 어머니 갈비뼈를 가르고 세상에 나왔다. 그 순간 대지에서 지진이 진동하더니 오색의 빛이 태미(太微)라는 별까지 관통하여 인간들은 달과 모든 별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 때 당이 꺼지는듯하더니 아이는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돌더니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때 손으로 천지를 쪼개는 듯 큰 사자 같은 울음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세상에 온 연유를 말하였다. 양친은 부러울 것 없이 아들을 귀엽게 키워 세상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석가는 사람들의 가난과 병고와 죽음을 보고 인간 고뇌에 해방의 길이 없는가 라는 혼자만의 고뇌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상은 석가의 탄생설화와 수도의 길로 들어 선 동기를 간략히 줄여 적은 것이다.
 외출 나갔던 불교가 약간의 윤색을 거쳐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의 부견이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백제의 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가 역시 진나라에서 들어와 불교를 선교했다. 신라에는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눌지왕 때 들어와 선교를 시작했다. 왕들은 이들 승려들이 가져온 지식과 이들이 설파하는 종교의 기초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 도처에 사원이 세워지고 이 종교에 대한 열의가 매우 높아졌다. 왕들은 자기들의 유서에서 고인의 시체를 태우게 되어있는 불교의 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였다. 타고 남은 재를 단지에 담아 특별히 마련된 시설에 보관하게 되니 이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탑이다. 고려조에 이르러 불교는 더욱 융성하였으며 왕은 자기를 호위하는 행렬의 선두주자에게 불경을 가지고 다니도록 명령을 내리고 여기에 필요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한 특별명령을 시행하고 사원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다. 이처럼 융성하던 유학을 국시로 삼던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불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상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짧게 요약한 약사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해서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일 것이고, 그 가르침을 얻는 방법의 기본이 ‘선(禪)’인데, 이 선은 볼 시(示)가 눈으로 본다는 뜻이고 입구(口) 두 개가 나란히 있음은 두 개의 입을 하나로 묶은 입은 다문다는 뜻이며, 밑에 있는 조(早)는 일찍 또는 빨리 한다는 뜻이니, 종합하면 사물을 빠르게 보기 위하여 일찍 입을 다물고 내성해야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기본 수행 방식을 말해준다. 배가 불렀을 때 볼 수 없었던 사물의 이치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입 다물고 단식하면서 깊은 내성의 세계로 들어갈 때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흐릿하던 곳에서 묘한 깃대를 보듯 어둠 속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무릅쓴 후 밝아오는 새벽과 같은 희열 속에 들어가는 즐거움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의 세계를 찬란하게 꽃 피워 세상이 아름답고 광명이 가득 찬 대 자연의 오묘한 질서까지 터득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청정하게 맑은 가운데 무한한 자애심으로 곧고 바른 상태의 사랑과 희생정신이 깃든 고요함의 경지 속에서, 일체의 사념에서 떠나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이처럼 선(禪) 자체는 수도의 목적이 아닌 방법일 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승려가 아닌 불도들이 반드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또 절에서 은근히 이를 조장하는 모습도 있어 원래의 선(禪) 또는 법(法)과는 멀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또 승려들 중에서도 일반인 보다 더 한 타락상을 버젓이 보여주는 모습, 또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곳곳에 들어서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는 불교 표지판(swastika)을 내걸고 버젓이 액막이 또는 무병장수 만사형통 등을 기원하는 전국을 복마전으로 만드는 불교의 수행방식인 선(禪)과 자꾸만 멀어져가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절이란 위의 선(禪)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장소이고 신도들까지 먼 산 속 절로 들어가 불공을 드리거나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이제 불교 자체만이 아니라 불교를 아끼는 전 국민적 각성이 필요할 때라는 말이다. 불교가 아닌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신앙생활과는 멀어진 보기에도 사나운 타락상이 연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들이 그런다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일관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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