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는 육십억에서 칠십억에 이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미 지하에 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 가지 한 결 같이 외쳐 온 소리가 있다. 사랑이니 행복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아닌 타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은 행동과 실천이 앞서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일수록 요란하게 입으로 악을 미워한다거나 선을 주창하고 또 남에게 그 선을 가르치겠다고 나서게 되어있다. 다른 무엇보다 말로는 쉽고 실천이 어려운 일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권장하거나 칭송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살리는 일이겠지만, 아무리 실천이 어려울지라도 이 일에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현생 인류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육십억 가지가 넘는 방법이 있듯이 모든 사람들은 각기 능력도 다르고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무리하게 자신의 단점을 고치거나 보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강점 또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하는 일에 자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작을 일 한 가지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그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조 22대 정조 16년(1792년)부터 4년간에 걸쳐 최악의 흉년이 제주도를 휩쓸었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도 참혹해서 볼 수가 없었다. 자식을 내다 버리고 사람을 잡아먹었으며, 심지어 묘를 파헤쳐 시체를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제주도에 아사자는 물론 인구 유출마저 심해지자 제주 해안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아져 해안경비가 취약해졌다. 조정에서는 제주도민의 출륙 금지령이 내렸다. 제주 사람은 육지 사람과 혼인도 금하였으니 제주 전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것이다. 이 때 이 흉년보다 보다 조금 앞 서 제주 사람 중 양민인 김응렬에게 만덕이라는 딸이 있었다. 만덕이 열두 살 때에 풍랑으로 아버지를 잃고, 같은 해에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형제자매들도 제각기 흩어지고 살길이 어려운 가운데 마침 퇴기가 된 여자가 만덕을 데려 가겠다 하여 그 퇴기의 수양딸이 되었다. 양어머니는 만덕에게 관기로 훈련시켰다. 보통 기녀는 자신의 딸에게 기생 직을 대물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기녀는 관노비로 엄격한 관리를 받아야 했는데, 졸지에 관기가 된 만덕은 열다섯 살 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만덕은 타고난 미모에다 기예의 재능으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으나 여염집 규수로 살 수는 없었다. 만덕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관아에 가서 울면서 호소했다. ‘소녀는 본래 양가 출신이온데 조실부모하여 부득이 관기가 된 것이옵니다. 소녀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호소에 목사의 선처를 받은 그녀는 기적에서 삭제되어 양민으로 살게 되었다. 그녀는 수 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건입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기생일 때 모은 작은 돈을 밑천 삼아 장사수완이 좋은 그녀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제주는 섬이지만 갯벌이 없어 소금 생산이 아주 빈약했고 대지가 메말라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 언제나 식량이 부족했다. 만덕은 쌀과 소금 등 생필품들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제주에는 쌀과 소금이 조금밖에 나지 않았지만 전복이나 오징어 같은 해산물과  미역은 지천으로 많았다. 특히 미역은 당시 동남 해 일부와 제주도에서만 채취할 수 있어서 조선 백성 절반이 제주 미역을 먹어야 될 정도였다. 만덕은 육지와 제주의 생필품 가격의 시세 차익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또 말의 산지인 제주에서 말을 길러 육지에 팔고 말총으로 탕건이며 각종 생필품을 만드는 원재료로 제공하는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돈을 모았다. 게다가 그녀는 매우 근검절약했다. 그렇게 살아왔던 그녀가 평생에 모은 돈 전부를 흉년에 죽어가는 제주도민들을 살리는 데 내 놓은 것이다. 제주 목사는 이러한 만덕의 선행을 조저에 보고했으며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정조는 목사를 시켜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게 하였다. 만덕의 소원은 육지에 나가 대궐도 구경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었다. 만덕이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한양으로 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원시인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여 얻으려고 다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날마다 나무 열매를 주우며 음식물을 찾아 여기저기 쏘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사이엔가 부족이 생겨났다. 부족이란 함께 생활하며 함께 사냥하는 대가족이다. 혼자 살기보다는 여럿이 사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농업의 발달이 그것인데, 사람들이 하루 종일 사냥을 하여 연명하기 보다는 땅을 경작하여 식량을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식량 외에도 많은 물자들을 필요로 한다. 이제는 수렵과 농업이 아닌 다양한 직업의 사회로 접어들었고 모든 제품들이 기계화, 능력화에 힘입어 대량 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풍족하고 안락하게 살아가야 할 일인데 어쩐 일인지 옛날의 가난뱅이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뱅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모순된 현상은 모든 동료 인간들이 뼈 빠지게 만들어놓은 물자들을 한 입에 삼키려고 사자 같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관리자나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노동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 즉 남이 땀  흘려 벌어놓은 것을 무더기로 빼앗아가는 계급이 속하는 사회가 존경받는 일이다. 나라님도 가난구제는 못한다는 소득 분배문제에 관하여는 수 없이 많은 이론들이 있어왔지만 그런 이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들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생스럽게 살고 있다. ‘정치가나 위정자들, 또 이른 바 사회의 상류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상한 경륜 속에서, 땅을 파서 타인에게 먹고 살 것을 제공하는 농민들을 죽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만 눈이 벌개 져 있고 그 기술마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고 할 때 무슨 답을 할지 궁금해진다. 고대인들은 자신이 직접 자연 속으로 괭이를 들고 들어갔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땅을 팠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였다고 말한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을 점점 깊이 이해해서 자연과 협력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이나 자연 현상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졌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려 들지 않고 그것을 숭배하며 제물을 바치고 평안을 기원했다. 자연이란 맹수와 같아서 어르고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둥이나 번개나 질병을 두려워하여 오직 제물을 바쳐야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식이나 월식을 재앙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출발점, 자신이 굶어죽지 않는 한 옆 사람이 배고파 허덕이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그 초심을 무엇이, 또는 누가 다 빼앗아 가버렸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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