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조상의 나라가 곧 우리나라다. 이미 수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조상)나라 고조선(古朝鮮)은 왕권을 확립한 기원전 7197년 9환족 12개 분국(거수국)으로 된 7세에 이르는 환인(桓因)이 세운 가히 동서양을 통틀어 시원국가(始原國家)인 환국(桓國)을 건국하여 3,301년을 다스린 다음, 1,565년간 18세에 걸친 환웅(桓雄)의 배달국(倍達국國), 뒤 이어 2,096년간 47세에 걸쳐 다스린 조선(檀君朝鮮), 이어서 북부여(기원 전 239년南三韓 포함) 221년 까지를 통틀어 이른 것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어 우리가 잘 아는 삼국시대로 접어든다. 위의 단군조선 47세 단군 중 3세 가륵 단군 6년(기원 전 2177년)에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手) 지방에 종신 유배시킨 일이 있다. 그리고는 후에 용서하여 그 땅의 제후로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이다. 가륵 단군에 이은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원년(기원 전 2137년)에 자신의 아우를 몽골리 한(干)으로 봉했다. 이어서 30세 내휴 단군 5년(기원 전 905년)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고, 32세 추밀단군 3년(기원 전 847년)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족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동양사에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들 북방민족을 융(戎 ), 적(狄), 호(胡)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흉악한 오랑캐로 불렀다. 하지만 북방 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중국인 자신들 만의 열등의식 또는 편견일 뿐, 북방 유목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과는 생활방식이 다를 뿐 야만인이 아니었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북방민족들이 모두 고조선의 분국 또는 지류였다.

 먼저 흉노 쪽은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秦)나라 때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에 걸쳐 살았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는데 한나라 초기 묵특 선우(기원 전 174년)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 번조선)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의 유목 대제국을 세웠다. 묵특 선우는 흉노제국을 종주국인 고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 왕이, 서쪽은 우현 왕이 통치하게 한 것이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일 년에 세 번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대군을 주어 흉노에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 군에서 동쪽의 갈석에 이르는 이른바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 등의 반란에서 유방과 항우 등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망하고 말았다. 진(秦)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漢) 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고, 흉노를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한 고조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뇌물을 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 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한 무제 때에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이 50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만 보았다. 흉노와의 전쟁은 한 나라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었고 국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흉노 공격에서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로부터 포로가 된 왕자 김일제(金日磾)는 궁의 말(馬)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김일제는 뒤에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으면서 무제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투후(秺候)로 봉하여졌다.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 나라를 건국한 왕망(王 莽)이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다. 왕망이 몰락한 후 위험을 느낀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와 가야의 왕족이 된 것임을 문무왕 비문 등이 말해주고 있다. 그 후 흉노는 내분으로 국력이 쇠약해졌지만 아시아 북방의 기마민족이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한 것은 사실이고, 서구인들의 눈에 일방적으로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가공스러운 야만족으로 비춰진 훈(흉노)족이 비단길을 통한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북 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이전에 흉노의 지배를 받던 여러 유목집단이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인 끝에 선비족(鮮卑族)이 패권을 잡고 북방을 통일하였다. 이 선비와 오환(吳桓)이 모두 동호(東胡 고조선이 분국 번조선)의 후예이다. 이 선비족은 2세기 중반에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선비제국은 흉노가 약화된 틈을 타 북으로 바이칼 호, 서쪽으로 신장의 이리강, 동쪽으로 만주 일대에 걸쳐 옛 흉노 지역을 차지하였다. 단석괴가 죽자 이들은 다시 분열되면서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와에 이은 허약한 위진(魏晉220-317) 시대에 이르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5호 16국 시대를 열었다. 이들 선비족(양견)이 세운 나라가 수나라이고 연이은 당(이연) 나라 또한 이들 선비족인 세운 나라이다.
 다시 단군조선의 3세 단군인 가륵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 단군의 명으로 지백특(支伯特 티벳)을 토벌한 이후, 18세 동엄 단군 때에 이르기 까지 조공을 받은 기록도 있다. 몽골 계열 중 하나가 돌궐(突厥)인데 오늘날의 터키(Turkey)가 그 후신이다.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단)우(單于)라 하고 또는 탱리(撑犁 tengri)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대가리’와 같은 말이고 이것이 ‘돌궐’로 된 것이기도 하다. 돌궐족은 원래 알타이 지역에서 주로 야금 일에 종사하였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이들은 흉노가 붕괴된 지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다시 통합하고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제국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흉노, 선비, 돌궐처럼 유럽과 서아시아를 지배했던 북방민족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이 신교 삼신문화의 천신(天神) 사상이다. 흉노의 선우는 천신의 아들로서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제사장이며 대리자였다. 흉노의 선우가 한 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을 ‘하늘이 세운 대 선우’로 칭하였다. 흉노인은 천신의 상을 만들었는데 금으로 된 큰 신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선비나 돌궐족 또한 흉노사회의 특색을 잃지 않았다.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고조선의 문화가 동북아의 북방에서 뻗어나간 유목민의 대이동을 통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남이라고 여기기 쉬운 이들 북방민족들이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들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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