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주 문왕 서 백(西佰) 희창(熙昌)은 은(殷 또는 商)나라 말기 은의 주왕(紂王)때 최고의 지방관(地方官) 중 하나인 백(佰)의 작위를 받아 역사에 남아 칭송 받는 명군으로, 또 그의 사후에 칠백년 주(周)의 왕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여기서 백(佰)이라 함은 우리의 고대국가 백제(百濟)에서 볼 수 있듯이 ‘밝다’의 음가를 표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듯이, ‘백’ 또한 ‘밝다’의 뜻으로 쓰인 것 또한 우리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의 지방관인 데서 연유한다.
 은의 서북부를 차지한 주(周)는 대대로 은(殷)나라에 충성하며 공물을 바쳐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시대에 제정한 법도에 따라 어진 정치를 베풀고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아끼고 유능한 선비를 예우했다. 주(周)의 영토는 그의 덕화에 힘입어 날로 늘어났고 주의 경내로 들어서는 백성들 중 농사짓는 사람들은 서로 밭고랑(경계)을 양보하고 길에서는 길을 양보하고 남녀가 길을 달리해서 다니고 짐 진 노인이 없었다.
 서백(희창)과 더불어 삼공(三公) 중 한 사람인 구후(九候)의 아름다운 딸이 궁녀가 되어 궁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깨끗한 행실에다 음란함을 싫어하여 은의 주왕을 화나게 만들어 죽음을 맞게 되고 구후 또한 죽어서 고기젓으로 담궈 진다.

 이에 또 다른 삼공 중 한 사람인 악후(顎候)가 주왕의 악행에 간언하다가 죽어서 육포를 뜨는 악형을 받게 된다. 그러자 주왕의 측근인 숭후호(崇候虎)가 ‘서백이 선행을 하면서 덕을 쌓아 제후들이 다투어 그에게 달려가고 있어 장차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라고 간언하자, 주왕은 주의 문왕을 잡아 유리(羑里 지금의 하남성)에 가두고서야 발을 뻗고 잘 수 있었고 이를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인 주왕은 문왕의 큰 아들 백읍고(伯邑考)을 인질로 잡아 왕의 마부로 삼으면서 까지도 안심이 안 되던 중, 문왕이 성인인지 아닌지 시험해 본다면서 백읍고를 죽여 곰탕을 만들어 문왕에게 보낸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문왕은 울분을 삼키며 아들의 곰국을 다 먹고 나중에 다 토하지만, 주왕은 그 제서야 문왕이 성인이 아니라면서 안심을 하게 된다.
 문왕의 신하 태전(太塡),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 등이 유리에 갇힌 문왕을 만나 그의 지시에 따라 미인과 준마, 진귀한 보물들을 뇌물로 바치고 감금에서 풀려나 후에 강태공을 만나 주(周)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다음 청의 장수 용골대가 척화파 김상헌에게 묻는다. ‘그대는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내려올 때 왜 따르지 않았소?’ , ‘나는 늙고 병들어 걸을 수 없어 따르지 못했소.’ , ‘그러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간 까닭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군대를 보내지 말라고 한 연유가 무엇이오?’ , ‘늙고 병들어 조정에서 벼슬을 주지 않았소, 내가 파병하지 말라고 상소한 것은 사실이나 조정에서는 내 말을 듣지 않았으며, 임금과 신하가 나눈 얘기를 타국에서 따질 일이 아니오.’ 그러자 청의 장수들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노인으로 생각하였다.
 당시의 강화파 최명길은 매국노라 할 정도로 지탄 받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나라를 위한다는 한 가지 생각 외 강대국 청나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협조한 일도 없었고, 청국이 모르게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청의 심양에 투옥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척화파와 강화파의 두 거두가 같은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최명길의 아들 최후량이 심양으로 가서 금과 은 수 천 냥으로 청나라 신료들에게 뇌물로 썼다. 그리고는 김상헌을 먼저 찾았다. ‘대감, 와병중이라 들었습니다. 좀 어떠신지요?’ , ‘따뜻한 곳으로 오니 한 결 낫구먼.’ , ‘대감, 산의생(주 문왕 위해 뇌물 사용주도)이란 어떤 사람이 옵니까 ?’ , ‘옛날의 성인이지.’ 그러자 최후량은 청나라 역관 정명수에게 뇌물을 쓰는 한편 아버지(최명길)에게 김상헌과의 대화를 알려주었다.
 어느날 밤, 김상헌의 옆방에서 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뉘시오?’ , ‘나 최명길이오.’ , ‘아니 지천(최명길의 호)이 옆방에 있었소? 이국만리에서 몹시 반갑구려.’ , ‘청음(김상헌의 호)이 내 옆방에 있다는 것을 내 아들을 통해서 알았소. 우리 문답이나 주고받으며 남아도는 시간을 보냅시다. 그리고 청음, 장차 정승의 자리에 덕과 공겁이 새롭기를 비오.’ , ‘지천도 나라를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하오. 우리 모두 오랑캐 땅에서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하오.’ 두 사람은 목이 메었다. 심양 감옥에서 두 사람의 화해 소식을 들은 이경여가 기뻐서 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내 왔다.
 
 ‘두 어른 경(정상적인 행위)과 권(임시조치 권도)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이거늘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 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 이제야 원만한 마음 합치는 곳
두 늙은이 모두가 백발일세.’
 청음(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비록 지조가 높다하나 지천(최명길)이 열어놓은 남한산성 문으로 나갔다. 아무 준비 없이 불필요한 전쟁을 끌어들인 결과가 빚은 참담한 시절, 왕족들이 피신했던 강화도마저 점령당하고 저항 능력을 잃은 절박한 상황 아래 일방적으로 욕을 먹어도 누군가 해야 했던 강화에 앞장서면서 항복문서 작성 등을 주도한 강화파 최명길 또한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한 것으로 인정받은 척화파 김상헌과의 반갑고도 서글픈 만남을 통하여 우리 또한 이해하고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어야 할 일이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