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형문화유산 제84-1호
고성농요 발굴자(인간문화재) 김석명

 고성농요의 발굴자로서 1970년대 초반 고성들판에서 불러지고 있던 「등지소리」의 실체정황과 숨은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고성들판 농부(金正柱)의 장남으로 태어난 본인(김석명)이 40~50년 전에 녹음기를 메고 고성군내의 사랑방 노인당 정자나무 밑을 다니면서 고성들판에서 일하던 어른들의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하면서 매우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조선 말기에 통영으로 가던 경상 감사(지금의도지사)일행이 고성들판을 지나다가 농부들이 논바닥에 엎드려 부르는 유창한 등지소리에 도취하어 행렬을 멈추고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소리를 즐기다가 어두워지자 그 농부들의 집으로 따라가 모캣불을 피우고 밤을 새우면서 소리를 즐기고 다음날 아침 후한 상을 내리고 떠났다는 전설의 실화였고 다른 하나는 해방 후 그 혼란기에 고성군에서 「고성등지」대회를 열었는데 거류면 신은부락 이열수(李烈洙)라는 분이 이 대회에 1등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본인은 이이야기를 듣고 기계화에 밀리고 서양 음악에 쫒기면서 우리 것이 모두 사라져가던 그 시대에 지역의 토속민요를 보존하기 위해 農謠경창대회까지 개최했던 지역이 고성을 빼고 전국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고성의 「등지」소리는 정말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꼭 보존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실화를 듣고 난 후에는 더욱 이일이 소중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욱 발굴 작업에 인생을 걸고 노력하였다.

   ▲ 고성농요 발굴과정을 설명하는 김석명 발굴자
 약 7년간의 발굴 작업 후 고성군 전역에서 소리꾼들을 모아 고성농요보존회 창립총회를 거쳐 개천예술제 및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할 준비연습을 고성읍 우산리 마을회관에서 강행군을 하기시작 하였고 이때 남자 앞소리꾼에는 고성군 등지대회에서 1등한 은월리 신은부락 이열수(당시60대 후반)옹이 맡게 되었고 여자 앞소리에는 우산리 유영례(당시 50대 후반) 씨가 맡아  연습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전국대회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둠으로서 고성농요가 전국제일의 농요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성들판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진다리」강이라는 자그마한 내를 중심으로 동부(구현.산촌.용산.은월,가려리)에는 李烈洙 翁을 따를 만한 소리꾼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가 있었고 서부(율대.동외.우산.죽계리등)에는 춤과 노래에 다재다능한 崔圭七翁의 부인 유영례씨는 원래 전라도 태생으로서 50세 초반에 고성에 들어와서 최규칠 선생과 부부가 되어 「고성등지」를 전수받았는데 목이 아주 좋아 女唱의 앞소리꾼이 되었는데 동부지역의 뛰어난 앞소리꾼 이던 李烈洙 翁이 전국대회를 마친 후에 황소에게 받치어 활동을 못하고 별세하는 바람에 창립회원 모집에 공이 많았던 李相洙씨가 소리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무형문화재 지정신청에 李烈洙 翁을 代身하여 代役으로 추천받게 되었으며 고성농요의 名稱도 일부 우산리의 사람들이 우산리 농요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고성전역에서 회원을 모았고 고성을 총망라한 보존단체로서 발굴되었는데 다만 연습장소가 우산리 라는 이유와 회원숫자가 많다고 하여 牛山農謠로 명칭을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固城農謠로 命名하였으며 그 당시 강용권. 임동권 박사도 고성농요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고성농요는1983년에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1985년에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본인(김석명)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일터에서 등지소리를 배웠으며 고성농요 발굴의 공로자로서 李烈洙翁의「등지소리」를 사사 받아 保有者 候補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보유자의 지정신청에 첨부된 錄音資料 역시 李烈洙(고성등지대회 1등)翁이 불렀던 고성의 동부지역에서 불렀던 소리를 전수받은 소리로 1992년 문화재위원회에서 고성농요 예능보유자(人間文化財)로 지정을 받게 된 것이다.
 경남 제 2의 곡창인 고성들판에서 동부와 서부의 토리가 약간 다를 뿐 고성을 대표하는 향토민요로서 특색이나 흐름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고성농요가 후세에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밝혀두는 것이 발굴자로서 당연한 소임인 것이며 조직원내에서 엉뚱한 아집을 불식 시키는 것 또한 발굴자의 몫이라 생각 된다.
 최근 조직내부에 엉뚱한 탐욕으로 사촌이 논을 사니 배가 아프고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고 온갖 모략중상도 했지만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고 현재 75명의 대식구로 발전한 고성농요는 세계민속음악의 중심 적 위치에서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표출하는 감동과 향수를 느끼는 공연이기에 사라져버린 근대 전래민속음악을 복원하려는 각국의 염원이 더욱 복고적인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으며 지난6월15일 개최된 대한민국 민속음악 大 축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유일의 민속음악 大축제로서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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