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사람이 사는 곳에 음악이 없을 수 없고 거기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고 불리어지는 대중가요는 우리의 생활 그 자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민요가 조선말의 격동기를 거쳐 외래문명과 외래음악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토착의 민요와 결합한 신민요 시대를 거쳐 해방 후의 대중가요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대중가요로 자리 잡기까지에는 암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정시대를 빼놓을 수 없는데, 바로 그대중가요 태동기의 모습을 한 번 되돌아   보고자 한다.
 때는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해외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 귀국한 홍난파는 우리나라 가요집과 음악 계몽지를 발행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끝에 삼광(三光)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 때 그의 집은 서울에 있었는데, 어릴 적 고향의 친구들과 뛰놀던 고향산천이 그리워 고향인 경기도 수원의 팔달산을 끼고 앉은 향촌 마을을 찾아갔다. 꿈에도 잊을 수 없던 고향에 잦아 온 다음 날이었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그를 찾아왔다. 소학교 시절에 홍난파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봉선이를 불쌍히 여겨 가끔 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가르쳐주곤 하였다. 그 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남달리 사랑하여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 봉선화를 심고 홍난파의 집 울타리 밑에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주곤 하였다. 그런 봉선이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앞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려가게 되었다면서 홍난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왔다는 것이다. ‘영후 오빠 잘 있어요. 이젠 오빠의 양행금 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듣고 싶어요.’ 영후는 홍난파의 본명이다. 홍난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여기고 찾아 온 봉선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고 바이올린을 들기는 하였으니 그녀를 위로해줄만한 곡이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녀 앞에 ‘양산도’를 탈 수도 없고 ‘노랫가락’을 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랑’을 타던 그의 머리에 언뜻 하나의 악상이 떠올랐다. 홍난파는 그 악상을 잡고 활을 그어 나갔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바이올린 줄을 적시고, 그 줄 위를 바이올린 활줄이 미끄러져가며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 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던 봉선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하였다. 봉선이가 흐느껴 울자 그녀를 배웅하려고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배웅하고 난 홍난파는 방금 전에 탔던 악상을 그대로 오선지에 적어 나갔다. 그 후 그는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였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겹쳐 생각한 그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렇듯 가요 ‘봉선화’에는 작곡가의 가슴 아픈 기억과 우리민족의 비참함이 깔려있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이채를 띠고 있는 이 가요는 소박한 음조와 규칙적인 장단의 반복으로 사람들을 깊은 사색으로 이끌어가는 특징이 있다. 또 이 노래가 홍난파의 처녀작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봉선화가 처음 창작되었을 때에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가사도 없고,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을 ‘애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홍난파가 자작 소설 ‘처녀혼’을 연극으로 각색하여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막이 오르기 전 바이올린으로 이 곡을 독주하곤 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배우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여인 역을 해야 했는데, 당시 연극배우 마해송이 처녀 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면서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붙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 형준이 가사를 달았는데 작고가가 봉선이를 배웅하면서 얻은 곡이었기 때문에 곡명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가사를 붙이자 이 곡은 민간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일제는 이 노래 봉선화를 못 부르게 금곡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2절의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라는 표현이 일제의 악정과 학정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민족의 설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며, 또 3절에서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고 하여 나라의 광복이 도래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가 나온 지 기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민족 사이에서 예술적 생명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 사이에도 널리 불리어지고 있다. 또 봉선화에 이어 내놓은 ‘고향의 봄’ 또한 당시 우리민족이 나라를 잃은 채 고향을 떠나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망국의 설움 속에 고향의 그리움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들은 일선일체(日鮮一體)를 내세우면서 조선인이 최소한 일본 노래 한 곡씩은 부를 줄 알아야 한다면서 민족문화 말살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청년 문호월은 일본의 우에노 음악 학교에 입학하였다가 학비 조달이 어려워지자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무용 창작에 뜻을 두고 있던 옥명화가 문호월을 찾아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의 춤가락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인 춤가락을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는 무용곡을 창작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문호월은 그녀의 부탁을 쾌히 수락하였지만 막상 곡을 쓰려고 하니 좀처럼 좋은 악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운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연구와 탐색에 몰두하던 어느 날, 그는 친구의 병문안을 갔던 길에 신불출과 함께 노들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의 노랫소리에 어울려 처얼썩 처얼썩 기슭을 치며 흘러가는 물결 위에 칭칭 늘어진 봄버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면 위에 비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살 길을 찾아 머나 먼 북관 땅으로 기약도 정처도 없이 떠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면서 흐느껴 우는 젊은 여인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이것을 본 문호월의 머릿속에는 언뜻 두 가지 악상이 떠올랐다. 그 중 어느 것을 골라잡아야 할 것인가 인데 생각할수록 여인의 슬픔을 그대로 오선지에 적어볼가 하다가 그 여인의 슬픔이 곧 우리민족의 슬픔이라는 곳에 생각이 머물자 나의 음악이 그 비탄을 표현하는 것  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그 비탄을 이겨내는 힘을 기르는 데 이르러야 한다는 데 미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칭칭 늘어진 봄버들에 서정적 기초를 두고 흥겨운 선율과 춤가락으로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수난과 슬픔을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였다. 문호월은 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어느 목로주점으로 들어갔다. 담뱃불에 타고 낡은 상을 놓고 신불출과 마주앉은 문호월은 알차고 구성진 선율을 적어나갔고 신불출은 선율에 맞추어 가사를 다듬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온 노래가 지금도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들강변’이다. 노래 속의 ‘노들’은 지명이기도 하지만 낫버들의 준말이기도 하다. 낫버들이란 노양(老楊)이나 수양(水楊) 같은 큰 버들이 아니라 낫으로 베기에 적당한 버드나무를 말한다. 이 낫버들은 바구니와 키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었다, 지금은 고어로 밀려 난 ‘낫버들’을 줄인 ‘낫들’에서 ‘나들’ ‘노들’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설움과 한숨이 가슴 속에만 묻혀있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에너지의 돌파구를 찾아 노래를 매개로 끝없이 발산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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