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뿌리 깊은 우리 고유의 민요에서 일정시대의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저항과 투쟁의 표출구로 사용되기도 해 오던 음악, 그 중에서도 서양 음악은 고급음악, 우리 것은 비천한 것으로, 또 대중들이 부르는 이른바‘ 유행가’를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던 분위기 속에서 해방을 맞았다. 지금의 일간지 문화면에 해당하는 식민지 시대의 학예란은 말할 것도 없고 광복 후에 20 여년이 지난 60년대에도 한국의 대중음악은 학예나 오락의 대접도 변변히 받지 못했다. 고작해야 스타들의 근황이나 스캔들, 혹은 음반 시장의 동향이 간혹 실려 눈길을 끌 정도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이와 같은 전반적인 백안시 경향은 이른 바‘ 클래식(classic)’ 또는 ’팝송((pop song)’ 으로 불리는 국적불명(일본 용어) 용어로 지칭해 온 서구 대중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비한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와는 달리 똑 같은 대중문화의 산물인 영화에 대하여는 그래도‘ 예술’로서의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영화와 더불어 20세기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온 우리의 대중음악에 관한 대중매체와 학계의 외면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전통적인 음악문화와 단절된 식민지 시대 하층계급의 문화였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식민지적 근대의 음악 엘리트층은 일본 혹은 일본 이상의 모델이었던 서구에 대한 일방적인 문화 예술 사대주의로 매몰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와 같은 성격이 해방과 분단을 경험하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것이 한국의 대중음악을 표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한 원인들일 것이다. 이렇게 되기에는 먼저 자료의 열악함을 들 수 있겠는데 문화적 자원으로서의 음반과 악보의 보존, 분류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관심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대중음악을 오락 중에서도 민초들이나 즐기는 비천한 오락으로 보던 분위기 속에서 정부나 사회의 관심에서 떠나 있었으니 누구 하나 비평을 가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자니 1920년 이후 대중 속에 깊이 파고 든 실체는 있는데도 그 정체성에 대한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눈앞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만 있으면서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한 모습으로 존속해 온 것이다. 사실 대중가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단속(斷續)적인 저급성이라는 변치 않은 믿음이‘ 유행가’라는 딱지 속에 표출된 것이다. 이어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음악 자체가 고급 혹은 저급이라는 이분법의 적용을 받기에 이르면서‘, 성악가’ 하면 해외로 유학 가서 정규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고상한’ 예술 가곡을 부르는 층의 몫이 되어갔고, 출세하고 싶어 상경하는 대중음악의 주역들에겐‘ 유행가 가수’라는 덤덤한 호칭이 주어진 게 그나마 이었던 것이다. ‘유행’이란 말 속에는 대중문화의 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획일적이고 무 정향적인 의미가 강조됨으로써 그‘ 유행가’는 대중(민초)에 대한 지식인들의 혐오를,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대중들의 체념을 생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다. 이러한 대중음악 본류에는 늘 이른바 두 박자로 된 트로트가 자리하고 있었고 바로 그 트로트를 이해하는 것이 대중음악의 본질과 역사를 이해하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저질과 왜색, 그리고 애상이라는 비판적 혐오의 딱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영역이 저인망식으로 퍼져나가면서 대중들의 음악적 무의식을 일깨워 삶의 반려로 이끌어 온 그 힘의 원천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크나큰 격동의 시회와 산업발전과 삶을 같이 해 온 이 대중음악 권은 자신들에 대한 지식인층의 무시를 무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들은 이미 광범위한 대중의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고작해야 한 줌밖에 안 되는 지식층의 태도를 유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어 이난영과 남인수로 대표되는 스타 시스템의 총아들이 등장함에 따라 대중음악은 전국적인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고, 1930년대 중 후반‘ 목포의 눈물’과‘ 애수의 소야곡’은 그야말로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어간 것이다.

 호남평야의 곡창을 뒤에 업고 서해와 남해의 각종 생선들이 포구로 모여들던 목포는 일제가 강점하기 이전에는 인심 후하고 인정 뜨거웠던 항도(港都)였다.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반도가 풍랑을 막고 있는 청호 목포 앞 바다는 그 옛날 여인들이 밥을 짓다가 찬거리가 없으면 국수 조리나 바구니를 들고 나가 고기를 퍼내어 집에 가져와서 생선국을 끓였다는 황금어장이었다. 더욱이 시와 노래로 전해오는 삼학도(三鶴島)는 마치 세 마리의 학이 바다에 앉은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곳이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면 시객(詩客)들이 유달산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유혹하는 은파연월(銀波煙月)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시상을 고르기도 하였고, 달빛과 정답게 속삭이며 한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호남평야를 굽이굽이 누비며 청호로 흘러드는 영산강 물결 위에 꽃구름이 비끼던 봄날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수면에 어리던 가을의 풍광은 또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는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 데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 이면 이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가사에서 보여 주 듯 사공의 뱃노래가 파도 깊이 스며들고 이별의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는 부두,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과 영산강을 안고 도는 유달산 바람, 떠나간 님을 안타까이 기다리는 여인의 사연과 그리운 추억 속에 다시 못 올 님 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이라고 애탄 하는 연정비가이다. 일제 침략자들의 등쌀에 못 이겨 못 이 땅에서는 살래야 살 수가 없어 가냘픈 조각배에 운명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간 사람들은 그 얼마 이어이었으며, 황해의 푸른 물결을 넘어 상해와 만주, 동남아로 정처 없이 떠나간 겨레는 그 얼마였는지 헤아릴 길 없다. 목포항 부두에는 정든 땅을 뒤에 두고 떠나가는 사람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우는 이별의 눈물이 그칠 새 없었으니, 목포는 이 노래의 곡명이 말해주듯 설움과 눈물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웃으며 왔다가 울면서 간다는 눈물의 항도가 목포였으며, 한 가닥 삶의 희망을 안고 찾아 왔다가 살 길이 막혀 방랑의 걸인이 된다는 탄식의 목포였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슬픔이 숭고한 감정으로 승화될 수 있거나 그러한 바탕이 이루어 질 때 문학이나 예술의 근저를 이루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에서의 무의미한 슬픔은 사람들의 정서적 감정에도 맞지 않거니와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도 없다. 민초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그 민초들을 따뜻이 감싸 안아 줄 때 거기에 예술의 필요성이 생겨나고, 또 생명성이 거기서 싹트고, 또 거기서 그 민초들과 함께 할 때 그 생명성은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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