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한자(漢字)를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의 글자로 알지만, 실은 우리 조상들이 태고 적에 만들어 미개했던 중국인들에게 전수해 준 유산이고, 그들이 이 글자를 가져 간 뒤에 긴 세월 속에 새 글자를 만들어 넣거나 의미 자체를 변조해 넣은 것도 많다. 예컨대 우리민족을 가리키는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원래 의미인 ’어질 이(夷)‘라 하지 않고 ’오랑캐 이(夷)‘라고 그 주해(註解)를 바꿔버린 것이 그 한 예가 된다. 이전 까지만 해도 우리 고조선의 제후국이던 흉노에게 칭신(稱臣)하면서 굴욕적인 조공을 바쳐오던 유방의 한나라가 무제 때에 이르러 겨우 그 굴레를 벗게 되었다. 한자(漢字)를 정리하던 신하에게 ’충(忠)‘자의 의미를 묻자 그는 ’사물의 본성‘이라고 대답하였으니 바로 공자님의 가르침 중 중요 대목이기도 한 ’본성대로 제구실하기‘가 그 답이었던 것이다.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마음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그 본분에 성실하라는 것이니 이런 미지근한 대답이 야심찬 무제에게 시원할 리가 없다. 얼마 후 그 신하가 내놓은 충자의 주석에 ’나라와 군주에게 향하는 마음의 중심에 흔들림이 없음‘이라는 것을 보고서야 무제가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오늘도 충(忠)은 이런 요지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제는 그 충성이 어떤 경우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인데, 북한 체제 같은 데서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충성경쟁에 남보다 뒤져서는 안 될 일인 것은 그 체제에서는 누구나 충성의 가면극에 나설 수밖에 없는 예외적인 사례가 되겠지만, 충성을 바칠 대상인 나라와 임금이 없던 일정시대에 있었던 안중근의사나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의 경우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그 길이 아니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삼문은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세조를 넘어뜨려 옛 왕을 복귀시키려는 계책을 꾸미다가 발각되자, 모진 국문을 받은 끝에 세조 앞에 끌려 나왔다. ‘네가 나의 녹을 먹으면서 어찌 나를 배반하려 하느냐’ 세조가 문초를 하지 성삼문이 음성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나는 상주(上主)의 신하로서 상왕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이오. 나는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 배반이니 역적이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오. 나으리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고 내 집에 있으니 뒤져 보시오. 나는 상왕을 위해 이미 목숨을 각오한 몸이니 죽여주시오.’ 이 말에 세조가 크게 노하여 형리에게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시키니 살이 튀고 힘줄이 탔다. 그러나 성삼문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소리쳤다. ‘아무리 참혹한 형벌을 가한다 해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어서 나를 죽여주시오.’ 성삼문은 살가죽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때 까지 단근질을 당했다. 그리고 큰 칼을 쓰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 때 그는 태연자약하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새 임금을 도와 천하를 태평케 하라. 나는 옛 임금을 뵈러 지하로 간다. 그는 형장에 이르러 참형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위해 재촉하는 데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황천에는 객점이 하나도 없다던데
 오늘 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성삼문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집을 뒤졌더니 과연 세조에게서 받은 녹비가 곳간에 그대로 쌓여있었다
 조선조 세종 때 집현전 학자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자 문장과 재덕을 겸비하여 일세를 떨친 인물이다. 그는 세조가 등극하던 날 분에 못 이겨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 했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사육신의 모의가 탄로나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세조가 질책하듯 물었다. ‘네가 나의 녹을 나의 녹을 먹고 있고 또 나에게 ’신‘(臣)’이라 일컬었으니 너는 나의 신하임이 틀림없거늘 어찌하여 배반을 하려 하느냐 ?‘ 그러자 박팽년은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저는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거늘 어찌 신하라 일컬었을 것이요?‘ 이에 세조가 증거를 댈 생각으로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축(지방 민정시찰 결과 보고서)을 가져오라고 분부하여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감짝 놀랐다. 그 곳에 ’신(臣)‘이라고 적힐 곳에 적힌 글자는 ’신‘이 아니라 ’거(巨)‘자로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신‘자는 작게 쓰게 마련이었으므로 세조는 당초에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팽년이 의도적으로 오자를 낸 것이었다. 이 때 세조가 그의 띄어난 지혜에 탄복하고 그의 명성과 재주를 아깝게 여겨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교섭을 꾀했다. ’네가 마음을 돌려 나를 돕는다면 너에게 평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리라.‘ 그러나 그는 끝내 세조의 뜻을 거절하고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형장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세조는 박팽년을 국문한 뒤에 잠깐 하옥시키게 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를 달래보려고 근시(近侍)에게 태종이 정몽주를 타이르기 위해 지은 시조를 들려주도록 했다. 그러자 박팽년은 다음과 같은 시조로 대답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 매라
 야광명월이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은(殷)의 뒤를 이은 주(周) 나라 무왕이 천하를 얻은 지 2년 되던 해 병으로 쓰러졌다. 그의 아우 주공이 형의 쾌유를 비는 제를 올렸다. 그의 3대 조상인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영혼에게 기원한 것이다. ‘3대의 왕이시여. 거룩하신 여러분의 뒤를 이으신 임금 발(무왕의 이름)은 너무도 애쓴 나머지 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자손을 지키실 의무를 지키고 계신다면 기꺼이 이 단(주공의 이름)은 임금 발을 대신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이 단은 다재다능하여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여러분을 모실 수 있다고 여기오나, 임금 발은 재주도 없을 뿐 아니라 이렇다 할 봉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 발은 사방에 길을 펴내야 할 상제의 명을 받은 몸으로서, 훌륭하게 주 왕실을 안정시키고 만민의 존경을 모으고 있나이다. 이제 만약 여러분의 임금 발을 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저희들의 임금에게 내리신 천명을 해치시지 않고 지켜주신다면 종묘에 계신 거룩하신 영혼들이 영원토록 평안하신 터전을 이루게 되겠나이다.’ 주공은 제문을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후 아무도 열지 못하게 했다.
 축문의 영험인지 무왕의 병은 회복되었으나 얼마 후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대를 잇게 되자 주공이 섭정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7년 섭정이 끝날 무렵 간신배들이 주공에 대해 역심이 있는 것으로 여기저기에서 이간질을 했다. 그러던 중 왕이 서고를 열고 주공이 무왕을 위해 지은 축문을 보게 되자 그 의심을 싹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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