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국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정신이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무기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에 승리할 수 없다. 해어진 운동화를 신은 월맹군이 고성능 무기를 보유한 월남군을 이겼다. 북한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가난하다가 퍼주기만 하다가 큰코다칠 일만 생겼다. 이들은 해방 이후 적화통일만 외치며 지금도 배를 곯아가며 남한을 괴롭히고 있다. 6.25를 모르는 젊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경험을 아는 세대들이 나라가 망할 때 어찌 된다는 것을 꼭 알게 해 주어야 한다. 전쟁이 두려워 공산화를 원하는 한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전쟁이 두려워 도망가면 살 것 같지만 전쟁으로 패망한 월남 사람들이 미국으로 도망 가 정처 없이 국적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어 있음을 수 없이 보아왔다.
 이상은 샤프 주한 미군 총 사령관의 걱정스러운 한국의 안보태세에 보내는 충언의 권고이다. 어찌 보면 자신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구경꾼일 수밖에 없는 나그네의 우려라고나 할 만 한 남의 일 걱정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바로 우리들의 생명에 관한 일이라는 말이다. 
 조상이 남겨 준 땅을 되찾을 때 우리는 다부(도로) 물려받는다고 말한다. 경상도 사투리로만 생각하는 ‘다부(도로, 되, 다시)’가 우리 자신들의 생명줄을 이어간다는 뜻임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다부’의 ‘다’와 ‘물리다’의 ‘물’이 합성되어 ‘다물’이 되고 전국 곳곳에 다물의 흔적이 음가가 비슷한 지명으로 남이 있는 곳도 있으니, 그 하나가 삼산면 두포리의 ‘두모’ 마을이다. 그렇다면 땅을 물려준 조상은 누구이며 그 땅을 되찾겠다고 나선 자손은 누구인가인데, 물려 준 조상의 나라가 고조선이고 그 땅을 원래의 주인이 되찾겠다고 나선 자손이 고구려의 창업자 ‘주몽’이 소리높이 외친 ‘다물’ 정신이 그 시작이 된다. 주몽의 정신이 고구려의 상무정신으로 이어지면서 광개토대왕 같은 위대한 인물을 비롯하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으로 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어 고려조에 이르러 서희. 강감찬, 윤관, 공민왕, 최영 등으로 이어져 온 다음, 조선조에 이르러 세종, 김종서, 최윤덕, 권율, 김시민, 이순신 등으로 이어진 다음 일정 때의 독립운동, 6.25 전쟁의 애국용사들로 면면이 이어져 온 우리의 다물 정신, 이제는 우리에게로 그 다물 정신의 공이 넘어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언 듯 머리에 떠 올릴 수 있는 다물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라면 주몽, 광개토 대왕, 을지문덕, 서희, 강감찬, 김종서, 이순신 등의 인물일 테지만 아마도 쉽게 잊혀 지면서 넘어가 버리기 쉬운 인물이 고려조의 31대 왕인 공민왕과 그의 충신 최영일 것이다. 이제 잠시 고려조의 그 당시로 돌아가 그가 이루어 놓은 다물의 업적을 돌아보기로 한다. 공민왕이 즉위할 당시 고려는 이미 국권을 잃은 원(元)의 속국이 되어 있었고 중국 본토의 홍건적 봉기로 어수선한 가운데 고려 역시 정국의 불안정과 애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생이 피폐한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한 편, 적극적인 배원 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잃었던 국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하여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몽고 풍속을 없애고 친원 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문종시대에 실시한 관제를 회복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였고 원나라 복속체제 아래에서는 거우 서무 결재권만 가졌던 왕에서 완전한 주권국가의 왕권을 회복한 것이다. 왕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 기반을 확립한 것이다. 또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왕후의 오빠 기철을 숙청하고 이 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내조 이후 백년간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원나라에 뺏겼던 서북 면 및 동북 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어 수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연이은 왜구의 침입으로 도성이 점령당하는 등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다물의 정신을 잃지 않았으니 후면에는 원 나라에서 고려로 시집 온 노국공주의 내조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공민왕과 그 이후 우왕, 창왕에 이르기 까지 한결같은 고려왕조에 충성을 바친 신하에 최영이 대표적 인물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영의 부친 최원직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는 이 유언대로 청렴하게 살았다. 공을 세울 때 마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전답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좁은 집에서 아주 청빈하게 살다 죽었다. 무관으로서 가장 출세했던 그는 사는 집이 누추했으나 이에 만족하였고, 음식이나 의복이 검소함은 물론이고 끼니를 끓일 쌀이 없는 때도 흔했다. 최영은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음식을 먹는 벼슬아치들을 보면 그들을 개나 돼지 보듯 멸시했다. 그는 전쟁에서 명장인데다 정치에서도 사심이나 욕심이 없으니 길게 연명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체구가 우람하고 힘이 장사였다. 사람들은 최영의 얼굴을 봉의 눈, 범의 걸음걸이를 지녔다 했고 한 번도 전쟁에 패한 적이 없으니 삼국지의 관우와 비슷하다고나 할 만하다. 최영은 군문에 들어가 왕의 시위가 되었다가 공민왕 때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대호군이 되었다. 원 말기에 중국에서 반란군이 여기저기에서 봉기하자 원은 고려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파견된 최영은 용감히 사원 큰 공을 세웠고 중국에서 본 원 나라의 실상을 왕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공민왕 8년 원의 공격에 몰린 홍건적 4만이 고려로 침입하자 반격에 몰려났고, 공민왕 10년에는 다시 홍건적 10만이 내침했을 때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과 최영이 합세하여 물리쳤다. 그 후 왜구들이 수 없이 내침하자 최영은 이성계와 더불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들을 격퇴하였으며, 그 중 가장 빛나는 전투는 우왕 때 부여에서 있었던 홍산 전투였다. 당시 중국 쪽으로는 홍건적의 뒤를 이은 신흥세력 주원장이 이끄는 명 나라가 강성해 지면서 요동에 웅거하던 원의 추장 나하추의 항복을 받아내고 나하추를 후원하던 탈고사첩목아를 달리박 근처에서 격파함으로써 요동으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명은 또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이 원에 속했던 땅이니 명에 구속시켜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으로 땅을 강점하려고 했다. 놀란 고려 조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명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우왕의 요동정벌 결심에 이르게 된다. 요동정벌의 선두에 섰던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죽이고 고려 왕실마저 페하고 자신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기에 이른다. 고려사를 쓴 조선조의 사가들이나 조선조의 사가들은 한 결 같이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이 터무니없이 위험하고 무모한 모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는 승자(이성계) 또는 후손들이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 뿐, 바로 그 때야 말로 우리의 다물 정신을 폭발시킬 때였음을 한 쪽으로 밀쳐버리고 하는 말이다. 당시 요동 정벌군의 총수였던 최영이 전투 지휘에 적극 나서려 하였으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우왕이 장인이기도 했던 최영을 전선에 못 나가게 붙들어 지휘관 부재의 원정군이 회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론인 우려는 실제로는 공허한 억지 불가론이었고, 당시 명 나라는 아직도 강성하게 잔존해 있던 북원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고려군이 요동을 친다 해도 전 국력을 동원할 겨를이 없었던 사정이었으니, 고려가 승리한다면 고구려의 옛 당을 찾을 수 있는 그 때야 말로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자기 땅과 생명을 자기가 지킨다는 다물 정신은 영원히 이 땅의 정신으로 살아 있어야 할 일이자 자손들에게도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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