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허허, 오늘은 풍색이 사납도다’. 포은은 큰 사발로 몇 잔을 마시고 친구의 집을 나왔다. 그 때 활을 메고 포은 앞을 지나가는 무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죽교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이 때 뒤따라오는 녹사에게 말했다. ‘너는 뒤에 머리 떨어져 오거라’. 녹사는 포은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소인, 다감을 따르겠나이다. 어찌하여 물리치려 하시옵니까 ?’ ‘너는 나를 따르면 안 되느니라’. ‘제 갈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 포은이 말렸으나 녹사는 기어이 따라왔다. 포은이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의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녹사도 그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세월이 흘러 성종 때 경상도 안찰사 손 순효가 여러 고을을 순시하러 가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포은 촌을 지나게 되었다. 비몽사몽간에 머리털과 수염이 몹시 희고 외관이 점잖은 노인이 나타나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포은이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피폐하여 비바람을 막을 수 없도다’. 손순효가 놀라 잠을 깨어 초라해 진 포은의 사당을 깨끗이 단장한 다음 사당 벽에 글을 썼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의 기강을 확립했으니,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오로지 공만이 청상 백설에 송백이 창창하듯 하였도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오니, 이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을 것이외다. 공의 영혼이 편안해야 나의 마음도 편안 하옵니다’. 송도에는 포은의 옛 집이 있었다. 선조 때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숭양 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이 숭양서원에는 화담 서경덕을 함께 모셨다. 선조는 고려조의 충절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고, 조선조의 관작으로 추존하기보다 그냥 ‘포은 선생’으로 부르기로 했다.

 후에 조선조 선비들은 포은 선생의 충절을 폄하하려는 움직임마저 일자 퇴계 이황이 말했다.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이 없기를 구해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이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포은의 충절은 가히 천지에 떨치고 우주에 동량이 되느니라. 한데 덕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쿵저러쿵 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미덕의 말에 귀를 가리며 듣지 않으려 하느니라.’ 또 정암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왕이 왕 씨의 후예가 아니냐의 여부를 당시의 사람들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포은은 본디 우왕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분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했으니, 그 어짊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적인걸이 측천무후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나라의 황실로 회복했다. 포은이 적 인걸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았는지 어찌 알 것인가. 고려 500년의 종사가 한 사람의 몸에 달렸거늘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사가 망해버렸다. 어찌 감히 포은을 경솔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포은 정몽주의 친구인 김 지수에게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하기 위해 불렀으나 칭병하면서 고사했다. 그 후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조정에 나오기를 청하자, 그는 사당으로 들어가 조상께 이별을 고했다. ‘이 몸이 세상에서는 편히 쉴 곳이 없사옵니다. 불초 소자도 조상님들의 뒤를 따르겠사오니 용서하여 주 시 옵 소 서’.김 지수는 아들에게 초상 때 쓰는 흉구를 들려 뒤따라오라고 명했다. 부자는 길을 떠나 광주의 추령에 이르렀다. ‘ 얘야, 여기가 내가 죽을 땅이다. 비록 여자일지라도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 하거늘, 하물며 나라의 신하가 되어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느냐 ?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느니라. 너는 내 시신을 거두어 추령 근방에 매장해 다오. 그리고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시신을 썩게 해 다오. 망국의 신하가 갈 길은 구차한 삶이 아니다. 그가 남긴 짧은 글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에 와서 그 누가 알 이 있으리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식량이 족하고 병력이 족하고 국민이 믿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경제가 잘 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거기에 모든 국민이 정부와 정치권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 불안한 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를 정치기구나 조직 같은 다른 곳에서 찾아서 될 일이 아니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야 할 일이고 바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가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일이다. 우리 모든 국민에게 모두 필수요건이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의 공인(公人) 또는 정치인들에게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 두 말 할 여지없이 애국심이다. 이 나라사랑이 있을 때 정치인들은 부정부패가 사라질 것이고 나라의 바람직한 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라사랑의 기반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능력이 오히려 국가에 해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미 공인이 될 기초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나라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가 사랑이 자리 잡거나 애국심이 자리 잡아야 할 자리에 이기심이 얼씬거렸다가는 나라의 존망마저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함에는 나라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뭉치는 것이 기본이다.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 데는 구 구심력 ‘나라사랑’ 아니고는 없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의 정신을 받들어 국가적 유산의 구심점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전 국민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인물, 애민사상(愛民思想)의 화신 세종대왕이 그 자리에 앉을 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목적에 표명한 바와 같이 애민사상, 민본사상,, 민주사상이 그 근간이다. 절대 왕권을 가진 당시의 군왕으로서 그러한 사상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니다.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등을 만든 과학자이자, 아악을 정리한 음악가이자, 왕 자신이 실제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 훈민정음 창제이고 그 근간에 애민사상과 민본주의가 있었다는 데 우리의 구심점을 모으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늘이 내리는 불행은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만드는 불행은 피할 수 없다. 덕(德)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늘 안 보이는 곳이 차곡차곡 쌓아가는 노력에는 게으름이 없어야 할 일이다. 사업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경영자에게 바로 그 덕이 기본 덕목이고 바로 그 덕을 잃게 되었을 때 그 경영 또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해서 좋은 일과 하면 나쁜 일에 대한 경계가 있다. 경계를 벗어날 때 법률의 처벌을 피해가더라도 세상의 비난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달려가서 한도를 넘어서서도 안 될 일이다. 욕망(慾望) 자체는 세상이 굴러가고 사회도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인 엔진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욕망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결국 사회는 혼돈에 빠지고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고 말 것이다. 올바른 구심점, 그리고 바로 그 올바른 구심점으로 마음이 모일 때 나라의 번영이 약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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