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화하(華夏)족의 통치자 중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성군이라면 두 말 할여지 없이 요(堯). 순(舜)이다. 황제(黃帝)가 죽은 다음 얼마 후 요(堯)임금이 천자가 되어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했고, 순(舜)임금이 요임금을 뒤를 이어 천자가 되고 나라 이름을 우(虞)라 했다. 이 두 황제는 검소하고 질박하였다. 요임금은 초가집에서 살았고 벽에는 석회를 바르지 않았으며 음식도 현미와 채소를 주식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항장의 녹피(鹿皮)로 견디었고 의복이 너덜너덜 해지지 않으면 갈아입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기아에 허덕이거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이것이 모두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요임금은 생각하였다. 그의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의 치세 때에도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어진 신하들이 순임금을 도와 더욱 빛나는 정치를 실현하였다. 이상은 화하족들이 남겨 둔 사서의 일부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거품으로 부풀려 포장된 모습을 드러내어 준다. 먼저 이들은 왕조가 이루어지기 이전 신화적 존재라는 단서 하에 요.순 시대를 시원(始原)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의 왕조가 확립 된 환국(환인), 배달국(환웅) 만으로도 5천년이 넘고, 게다가 단군조선 역사만으로도 4,348년 전임을 잘 아는 그들이 이에 뒤질세라 급조해서 같은 시대로 잡는다는 것이 그들 왕조(禹의 夏 나라)확립 이전인 요(堯 )의 시대를 잡은 것이고 역사 이전의 신화의 세계로 치부한다면 얼마든지 미화할 수 있으니 요와 순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친 것이지만 그 허점은 이미 드러나 있는 사실이니, 요임금은 권력 쟁탈전 끝에 순임금에게 나라를 잃고 그의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도 못한 채 쫓겨나 객사했으며, 순임금 또한 우(禹)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에 밀려 황무지에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니 그들이 말하는 선양(禪讓)이니 뭐니 하는 것이 모두 우스꽝스러운 소설이 불과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닌 진짜 애민사상만을 가슴에 품은 군주가 있었으니 조선조 3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4대 왕이 된 세종대왕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우리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시킨 정복 군주였다면, 세종대왕은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창조적인 문화군주였다. 사실 군주로서 세종만큼 이 임무를 더 할 수 없이 잘한 왕은 세계사에서도 없다. 왕의 수많은 치적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왕에게는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기본정신이 있었으니 애민정신(愛民精神)이 그것이다. 세종 7년 가뭄이 들자 왕은 궁 밖으로 나가 근교를 돌아보며 농민들에게 작황을 물었다. 농사를 망쳤다는 대답을 들은 세종은 점심도 먹지 않고 궁으로 돌아왔다. 당시 먹고 사는 일이 농사에 달려 있었는데, 대부분의 논이 천수답이었고 기후까지 나빴던 데다, 농업기술이 낙후되어 농업 생산성이 말이 아니었다. 세종 시대에도 매년 가뭄이 들어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우제나 자주 올리는 것뿐이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여 년 간 단 한 번도 가뭄이 들지 않은 해가 없어서 백성들 중에는 흙을 파먹는 사람도 생겨났다. 세종 6년에는 심한 가뭄으로 강원도 전체 가구의 3분의 1이 사라지고 농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을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참혹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삶이 기근으로 피폐해지자 강녕전을 버리고 경회루 한 쪽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을 살 만큼 백성들과 아픔을 같이 한 군주였다. 그러면서도 고뇌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무려 열하루 동안이나 잊은 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세종은 정무를 볼 때도 언제나 대신들에게 날씨와 작황을 물은 다음 정무를 시작했다. 천문학상 이 시기에 태양활동이 매우 적고 일조량이 적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가 계속된 것이다. 정성을 다 해 기우제를 지내는 것만으로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애타는 마음을 달랠 길 없게 된 왕은 과학적 영농법에 진력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데 전력을 다하기에 이른 것이다.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여 강우량 통계를 내어 농사에 적용토록 했고, 그동안 정확치 않았던 명나라의 달력 때문에 절기에 착오가 있던 것을 조선력(朝鮮曆)인 ‘칠정산’,을 만들어 해결했으며,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 하루 일과를 관리하여 농사일에 체계적으로 시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직파재배를 하던 그 전의 벼농사에 모를 옮겨 심는 이앙 법을 적용하기 시작했으며,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사직설’을 간행하여 각 지역에 맞는 작물과 농법을 선택하여 농사짓도록 했다. 농사직설은 조선의 독자적인 농업을 전국적으로 조사해서 만든 최초의 농서로 모든 농업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료 만드는 방법까지 기술되어 있다. 이 농사직설은 전국에 반포되었으며 이러한 세종의 노력으로 작물생산이 크게 늘어 세종 때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농업 생산성을 기록하게 되었다. 세종 20년이 지나자 더 이상 기근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으며 국가에 비축된 곡식이 500만석에 이르렀으니 선조 때 비축미 50만석의 열 배가 된다. 왕은 농업생산력 증진에만 애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작은 어려움에도 마음을 썼다. 관비의 출산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늘려주었고, 남편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 임신한 여인의 남편에게 출산휴가를 준 것은 세계 최초의 일이었다. 세종은 또 참으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으니, 해동청을 기르는 것이 민폐를 끼친다 하여 매를 놓아 보냈고, 당뇨병에 양고기를 드시라는 권유에 양고기는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다며 먹지 않았다. 세종 12년(1439년)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그리고 조선 초유인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으니, 농지 과세를 위한 공법 제정에 앞서 백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반년이라는 기간 동안 전국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신법에 대한 찬반을 물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왕의 애민정신인 것이다.

 왕의 빛나는 치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한글 창제이다. 그 외에 화약무기 발전, 국토확장, 조선의 자체 달력 제정, 천문기기 제작 등의 천문학 발전, 공평조세를 위한 공법 시행, 법전 완비, 예악 완성, 인쇄술 발전, 대 국민 설문조사 등을 들 수 있다. 한글 창제와 더불어 큰 업적 중 하나가 여진족을 정벌하고 국토를 넓힌 일인데, 이 때 우리에게는 명나라의 기술은 능가할 정도의 화약무기 개발에 발전이 있었으니,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세게 최강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세종 때에 쌍전화포, 천자포, 지자포, 등 사거리가 1,500m나 되는 포와 로켓포의 전신인 주화가 개발되었다. 당시 화약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명과 조선   뿐이었는데 조선의 화포가 명의 화포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이처럼 세종은 무기를 개발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늘려나갔다. 일본에서 사신이 오거나 북방의 여진족 사신이 오면 조정에서는 성대한 불꽃놀이를 열었다. 단순한 불꽃놀이가 아니라 화약무기가 없던 일본이나 여진족에게 조선 화약의 우수성을 보여주어 기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무력시위가 후대에 이르러 유비무환을 잊은 채 역동성을 잃게 되면서 나태와 무기력이 지배한 왕실에는 왕들의 오락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꽃들이 유성처럼 하늘을 수놓고 우레 같은 소리를 내자 일본. 여진 사신들이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 불꽃놀이를 가장 즐긴 왕이 성종이었다. 이러한 유비무환을 하늘에 날려버린 빈자리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들어섰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되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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