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의 참된 역사에 대하여는 이 란(column)을 통하여 수 없이 반복한 바와 같이 환인의 환국, 환웅의 배달국, 단군의 조선, (북)부여, 삼국, 고려, 조선, 대한민국의 순이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는 환인, 환웅, 단군이 모두 신화 속으로 묻혀버리고 부여는 그저 그림자만 살짝 비추는 듯싶더니 사라지고,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인 다음 우리 땅 깊숙한 안방인 지금의 평양 중심으로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간악한 일인들이 비틀어놓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이번에는 구천 여년을 흐르고 있는 우리 역사의 물줄기에서 부여 편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먼저 부여의 계보를 보면 기원전 해모수단군(기원 전239년)의 건국에 이어, 모리수단군, 고해사단군, 고우루단군, 고두막단군, 고무서단군에 이르는 6대 이후 고무서단군의 사위이자 해모수단군의 고손자인 고주몽에 의한 고구려로 이어지게 된다. 이 (북)부여와는 별도로 동 시대에 해부루 라는 해모수단군의 한 지파가 동부여를 세우고 금와, 대소에 이르는 3대까지 이어지다가 고구려로 통합되었다. 해모수가 건국할 당시 단군조선의 47대 고열가단군 시대인데 나라가 어지러워 고열가단군 스스로 단군의 자리를 내어놓은 정권부재의 혼란기에 단군조선의 통합하여 계승한 인물이 해모수인 것이다. 해모수의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단군조선)의 서방진출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고조선의 일부 영역 번조선(변한) 땅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 온 한족 난민으로 넘쳐났다. 이 난민 중에는 한고조 유방의 친구로서 연나라 왕이 된 노관의 부하 위만이 끼어 있었다. 변한의 기준 왕에게 환심을 산 위만은 몰래 세력을 길러 왕검성을 쳐서 기준 왕을 내쫓고 위만 정권을 세운 다음 그의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서 한 무제(漢武帝)의 침공을 받게 된다. 바다를 통해 침공한 양복(陽僕)도, 육로로 침공한 순체(荀彘)도,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모두 패하여 처형 또는 처벌 받고 고전하던 중 위만정권의 내분을 틈타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니계상(尼谿相) 삼(參)을 홰청(澅淸) 지역의 제후로 삼는 등 단군조선 사람들을 제후로 삼았다. 이 왕검성이 있던 변한 지역이 지금 산해관의 서쪽 갈석산을 경계로 한 지역이니 지금의 평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한무제가 봉했다는 제후들도 곧바로 부여군에게 패하여 사라졌으니 전쟁에 패한 그들이 요서, 요동 땅을 지배할 수 없었던 사실이 자명한데도 교과서가 말하는 ‘위만이 고조선 계승, 평양에 한사군 설치’ 라는 일제가 만들어 낸 엉터리 역사를 어린 후대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한 무제가 우거를 이긴 기세를 몰아 북부여로 침공하였다가 고두막한(高豆莫汗)에게 대패하였고, 이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卒本)부여가 된 것이다.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국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사학의 각본대로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끼워 넣고 위만정권이 한나라에게 망한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에 한사군울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진실의 연결고리(역사)인 단군조선의 계승자 북부여가 들어설 자리가 교과서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말이다. 또 교과서는 더 나아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단정하면서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는 엉터리 까지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사가 난도질을 당하여 빠진 것은 한나라의 사가 사마천이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한 무제의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의 실체를 빼어버린 것이 그 시작이고 일제가 마음대로 조작한 것이 그 결말이다. 사마천 이후의 사서인 후한서가 말해주는 부여의 기록 일부를 보기로 한다 ’부여는 동이의 땅 중에서 가장 평평한 평야로 토양은 오곡이 잘 되고 명마와 붉은 옥, 담비 등이 난다. 큰 구슬은 대추만 하고 성책을 둥글게 하여 성을 쌓고,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과격하고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 창으로 병기를 삼는다. 여섯 가축으로 벼슬 이름을 지으니 마가, 우가, 구가 등이 있고, 읍락의 모든 군주는 모두 제가에 속한다.

 ‘북부여 2세 모수리 단군 아우(高眞)에게 손자인 고모수(高慕漱)라는 황손이 하백의 딸인 유화 사이에 아들을 두게 되니 그 아들이 주몽이다. 그 유화부인이 주몽과 같이 동부여 궁에 있을 때 사람들이 금와 왕에게 ‘주몽은 나라에 이롭지 않으니 죽여야 합니다’라고 줄기차게 나서자, 위협을 느낀 주몽이 유화부인의 명에 따라 엄리대수(송화강)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열게 되니 고구려의 개국인 것이다.
 이 부여는 나라 이름이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에 이르는 천 년에 걸쳐 만주에 존속하였고, 마지막 부여의 분파인 고구려의 연나부(서부여)가 사라질(494년) 때 까지 존속하였다. 또 4세기 말 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지방으로 이주하여 5-7세기 초 까지 돈 강 유역과 북 코카서스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서양사에서 말하는 불가(Bulghar)족의 역사는 부여 역사의 계승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불가리아이다. 아스파루흐(Asparukh)가 이끄는 일부는 발칸반도로 남하하여 당시 비잔틴제국(동로마)과의 결전을 앞두고 단군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으니, 환 . 단 이래로 동방 한민족이 일관되게 거행하여오던 제천 풍속을 서방으로 이주한 부여족이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불가(부여)족은 마침내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하였고, 이 불가 족이 보야(Boyar)로 불리는 지배계층이 되어 슬라브족을 노예로 다스렸다. 황제 크룸(Krum) 때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 대부분을 추방하고 수도를 소비(우리말 ‘사비’와 같은 말 Sophia)로 정하고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산 이름을 발칸으로 정하였다. 이 발칸산은 ‘밝안산’, ‘밝산’, ‘백산(白山)’, ‘백두산’ 등 우리말 지명과 동일하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밝은 산’에 올라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지금도 크룸 황제의 제천 유적이 일부 남아있는 이 발칸 산에서 발칸반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불가 족은 슬라브족과의 혼혈로 그들의 생김새로 변하고 말았지만, 아직도 우리한민족의 체취는 그대로이며, 그 불가 족 (불가리아인)만이 서방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몽골반점)이 있다는 것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닌 듯하다.
 엉터리 지식 보다는 무식이 훨씬 낫다.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우리의 민족문화 말살과 역사 비틀기가 광복 후 수 십 년이 지난 오늘도 진실을 밀어 낸 자리에 버젓이 자리 잡아 어린 후손들의 머리를 오염시키면서 세계사마저 똑 같이 오염되고 있는 현실을 절대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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