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이제 가을이 짙어가고 있다. 나뭇잎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고 있으며 바람결에 한잎 두잎 떨어지고 있다. 봄에는 잎을 내고 여름에 왕성하게 자라서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요.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다. 이런 자연의 섭리가 해마다 반복 되풀이 되며 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필자는 몸이 몹시 아파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입원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기도 하였고 숨을 거두기 전에 유언을 하는 사람도 보았고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치는 사람도 보았다. 또한 육체의 고통에 매우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았고 갖가지 질병의 고통으로 죽은 듯이 수년 동안 병원생활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지금 현재도 이런 일이 되풀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으나 우리는 삶에 쫓겨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마다 필자는 저런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앞으로 겪을 일이라고 깊이 느꼈다. 그래서 필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필요함을 느꼈다. 죽음은 언제 어느 때에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른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항상 이별의 말을 남겨 두어야 한다.  말 한마디 남겨두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이 세상을 떠난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이란 무엇인가? 단풍이 짙어가는 이 가을에 독자들과 삶과 죽음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자 한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한 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 자나 우매 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에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로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그러므로 나는 살아있는 산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났다 하였노라.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데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 하느니라.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열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거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그기 걸리느니라. ‘(참조: 전도서) 기독교 경전에서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명의 원리인 인간의 호흡이 거두어 지면 신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심장은 박동을 그치고, 두뇌는 작용을 그치며, 혈액은 순환을 중단한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 사라진다. 다윗은 “주의 영(호흡)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사후에 인간이 생각하는 일, 곧 지성은 어디로 가는가?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무릇 산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함께 있지만 우리는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영혼불멸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생물학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어릴 때 경험하는 죽음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나이를 먹어 가면 죽음이 아주 조금은 친숙해진다. 점점 한명 두명 주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지만 여전히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생물학적인 에너지가 점점 떨어질 때 조차도 죽음을 애써 외면한다.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죽음을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준비하고 인정하는 시간을 갖고 죽는 사람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의 주변 이야기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서 사라진다. 그의 흔적은 여전히 내 삶 곳곳에 남아있는데 만날 수가 없다. 단순히 사라졌을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감정과 죽음으로 인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감정은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같아도 감정은 다르다.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배우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보는 여정이 필요하다. 현실과 상황에 상관없이 삶은 계속된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반복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맞닥뜨리려고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것은 비싼 돈을 마다하지 않고 사먹으며, 꼭두새벽부터 운동하느라고 체육공원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들의 눈빛에는 어떻게 하든지 죽음을 피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배어나온다. 그러나 건강하게 사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는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하루살이는 새벽에 태어나 저녁이면 알을 낳고 죽는다. 대부분의 곤충들도 일 년을  넘기지 못한다. 다만 동물들만 여러 해를 살아갈 뿐이다. 일년생 식물들은 봄에 싹이 나서 바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 안에는 씨앗이 들어있다. 씨앗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이다. 물론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식물에게는 죽는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사라진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식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본능처럼 알고 있기에 생명이 붙어있을 때, 자손을 번식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떠나는 것이다. 사람들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머리로 아는 것뿐이지 실감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말기 암 환자라도, 자신에게 닥친 암울한 상황을 당황해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 역력하게 읽힌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든지, 아니면 순순히 인정하든지간에 상황이 바뀌는 법이 없다.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는 있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얼마의 기간을 살 수 있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다. 대략 80세 전후이다. 물론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삼십 대에 일찍 떠나는 이들도 있다. 칠십대에 가까운 필자도 이제는 인생의 4분의 3이 지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면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만큼 알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일에도 교훈으로 배우지 못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삼아 가슴에 새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물은 물이 솟듯 문득 생겨나서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 것이다. 변화하여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하여 죽을 뿐인데, 살아있는 것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통해 한다. 죽음이란 활 통을 풀고 옷 주머니를 풀듯 흩어지는 것이며,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가는 것이니. 이는 곧 위대한 자연으로의 복귀이다. 삶이란 형체가 없이 흩어졌던 것들이 모인 것이고, 죽음이란 모여 있던 것이 흩어지는 것이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지만 도에 이르려는 자가 힘써 추구할 바는 아니다. 세상의 미물들도 자기 죽음을 예기하고 슬퍼하는데, 사람은 죽음에서 면제된 존재처럼 살 때가 있다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하는 우둔함 탓이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죽음과 두려움은 늘 함께 간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이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본성 깊이 뿌리박힌 강한 본능인 반면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현대과학도 죽음만은 정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의학의 도움으로 수명을 얼마간 연장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역시 죽음은 우리를 언제 불러 갈지 모르며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삶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궁금증에 비례하여 해석도 다양하다. 우리는 생명과 우연에 관해서 생각해야 한다. 죽기 전의 마지막 일상을 누리는 것을 비난했어야 하는가. 그가 마지막으로 욕심내 누린 하루를 비난했어야 하는가. 그에게는 곧 떠나버릴 세상일 뿐이다. 죽음 후의 남겨진 세상에 관해 죽은 자는 관심이 없다. 그 세상이 자신 때문에 몇 명이고 죽어버릴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에게는 그럴 의도도 없었다. 욕심이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투쟁해서 얻어온 생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싶은, 지극히 평범하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 어차피 그것을 비난한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난은 나의 것인가, 아니, 그건 우연으로 벌어진 일에 가깝다. 헛된 격려가 되었어도, 그것이 다른 죽음까지 초래했어도, 도의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우연이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그렇듯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굴레와 속박 속에서 지내야 하므로, 이 일에 관하여 두고두고 생각하여야 한다. 어쨌든 억울한 한 죽음이 있었고,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 생명들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엮인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서도, 실은 우리는 어떤 죽음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의 반대인가? 퀴블러 로스는 인간이 죽음에 직면할 때,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감정의 5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 부정(Denial) - 'It's not happening'의 단계이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 등의 표현을 한다. 진단을 잘못 내렸다는 생각과 좀 더 나은 진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의사와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게 되며, 환자는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2) 분노(Anger) 'Why Me?'의 단계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나야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거야" 마음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단계이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절대자에게 분노를 발산한다. 3) 협상(Bargaining) 'Seeking Compromise'의 단계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대자와 타협하는 단계이다. "고쳐주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재산 모두를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등의 거래를 한다. 4) 우울(Depression) 'Giving up hope'의 단계이다. 협상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해답도 찾지 못하면 그 다음 단계는 체념이다. 만사가 귀찮아 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빠질 수도 있다. 5) 수용(Acceptance) 'Being at peace'의 단계이다. 억울함이나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때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삶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은 일상 안에서 경험하는 보편적인 현상이자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처음부터 수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초상집에 갈 때 그것이 곧 나에게 닥쳐올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후회 없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 5분의 시간을 주었을 때 그들은 어떤 말을 할까? 자연의 섭리에 감사하며 이웃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가족과 친지에게 감사하며 그렇게 배려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내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듯이 어차피 내 자신도 그렇게 떠날 것이라고 배워야 한다. 그런 많은 것들을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도록 다짐할 때 우리의 삶은 죽음 앞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더욱 겸허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일 때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이제 단풍잎이 짙게 물들어 바람결에 흩어져 떨어진다. 가을이 깊어만 간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는 진리를 자연은 똑똑히 우리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초상집에 가서 ‘사람의 삶이란 무엇인가?’ 를 자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람이 된다. 우리 모두의 인생의 끝은 죽음이고 결국은 한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지나가는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단풍잎이 내 머리에 앉는다. 붉게 물든 이 단풍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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