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필자가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앞만 쳐다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평생 자신의 욕구대로 구하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자신이 언제 어느 때에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면서 백년이나 천년이나 살 것처럼 모으고 욕심내고 발버둥 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빈 몸으로 가는 것이다.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요. 빨리 죽고 싶다고 빨리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과 죽는 것은 진리이다. 누구든지 늙음을 피할 수는 없으며 또한 늙으면 각종 질병이 찾아오는데 그것도 피할 수가 없으며 질병의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과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나 이런 단계를 생략하고 죽음으로 바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늙기도 전에 죽거나 병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은 죽음과 관계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과거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며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오직 현재만 존재하는 것이나 이것도 번개처럼 지나간다. 금강경의 핵심사상을 간략한 4구의 형식으로 요약한 게송을 ‘사구게’ 라고 말한다. 필자가 불경의 내용을 또다시 인용하는 까닭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걱정과 근심이 떠날 날이 없기 때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독자들과 담론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고통은 몸이나 마음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말한다. 사람마다 그 고통이 천차만별이며 헤아릴 수 없도록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다만 결과로 나타날 뿐이지만 인간들은 그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조차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한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욕구이다. 우리의 인생은 늘 조건부 인생이다. 희로애락이 늘 반복된다. 자신의 욕구의 조건에 맞으면 좋아하고 안 맞으면 싫어한다. 이렇게 해서 늘 행복과 불행이 되풀이 된다. 우리의 인생이 괴로운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근본 뿌리는 욕구이다. 이 욕구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과 몸이 이끌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욕망의 세계라고 한다. 욕구가 만족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것이 행복이고 욕구가 만족되지 못해 기분이 나빠지면 그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행복과 불행은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욕구의 종류에는 수도 없이 많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욕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는 장작불에 비유하기도 한다. 장작은 타면서 장작을 계속 더 필요로 한다. 장작을 부엌에 집어넣으면 불꽃이 더 커지고 그만큼 장작을 더 필요로 하게 된다. 끝이 없는 것이다. 욕구가 만족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점점 더 커진다. 그것이 욕구의 성질이다. 우리는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항상 즐거움만 있고 고통은 없으면 좋겠지만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항상 붙어 있어서 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행복만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바란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니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어떤 날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또 어떤 날은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모든 것이 잘되는 날 우리는 “천당이나 극락이 따로 있나? 이게 천당이고 극락이지” 라고 말한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이게 생지옥이다.” 라고 말한다.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늘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한다. 이것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괴롭다 할 때는 육체적 통증, 미움, 원망, 슬픔, 고독, 외로움 등을 말한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구가 사라져버린다고 가정을 하면 고통도 사라진다. 그러나 욕구가 사라지면 덩달아 낙도 같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고와 낙이 사라진 상황을 윤회가 없어진 열반이라고 한다. 욕구의 근본 원인은 집착이다. 그렇다면 집착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것은 무지로부터 온 것이다. 이 무지에서 벗어나면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어떻게 해야 집착에서 멀어질까? 어떻게 해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이다. 이것을 도라고 한다. 결국 도를 닦으면 고통의 원인인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진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행이 필요하다. 그 수행의 핵심적 요소는 ‘사구게’에 모두 들어있다. ‘사구게’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아무런 쓸모없는 말이지만 수행을 통해 그 의미를 고찰하면 그 깊이를 가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사구게’는 금강경의  5장, 10장, 26장, 32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선승들의 해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니 삶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한다. 지혜 있는 독자는 필자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할 능력이 있으리라고 본다.

 제1구게: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니라.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如理實見分 第五 : 여리실견분 :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라. 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所設身相은 卽非身相일새니이다. 佛告須菩提하사되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니라.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불고 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제2구게: 不應住色하고 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 . 향기 . 맛 . 부딪침 .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莊嚴淨土分 第十:  장엄정토분: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昔在然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在然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이니 是名莊嚴이니이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은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하고 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이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이다.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 부.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  실무소득.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 부.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 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 부.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얻은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안 하느냐.』 『아니 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오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오며 그 이름이 장엄이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 . 향기 . 맛 . 부딪침 .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 이름 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제3구게: 若以色見我거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법신비상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須菩提言하되 如是如是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佛이 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면 轉輪聖王도 卽是如來로다. 須菩提-白佛言하되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거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 부.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관여래.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이시 세존 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서른두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서른두 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뵐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서른 두 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서른두 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제4구게: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하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 . 거품 . 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비진분: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提心者하야 持於此經하되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며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일지니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하라. 佛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니라. (수보리 약유인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 지용보시 .약유선남자 선여인 발보살심자 지어차경 내지 사구게등 수지독송 위인연설 기복승피. 운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불설시경이 장로 수보리 급제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일체세간 천 인 아수라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 )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했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 여인이 보살 심을 내어 이 경전을 지니되 내지 사구 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어 남을 위해 연설해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 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이러하니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 . 거품 . 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비구 . 비구니와 우바새 . 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사람 . 세상사람 . 아수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정리하면 우리는 모두 행복을 구하려 하지만 실제 구하고, 취하고 있는 것은 즐거움이다. 즐거움 중에는 오락, 향락 그리고 쾌락이 있는데 이러한 즐거움  만을 구하고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으로 인해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다. 즐거움 속에서 행복하지 못한 것은 항상 즐거울 수 없으며, 즐거움은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좋은 옷을 입는 다든지, 좋은 음식을 먹는 다든지,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 또한 즐거움 즉 쾌락적인 것으로 이것이 행복은 아니다. 쾌락은 흥분과 허탈의 반복이며, 결국 불안함 만이 남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인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즐거움과 편안함을 두루 갖춘 것이 행복이라 할 것이다. 불안이 없어야 편안해 지는데, 불안을 주는 요소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인데,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는 불안의 요소인 생로병사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닦아야 한다. 생로병사에 편안해지면 즉,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 했다. 참 나(眞我), 참 사람(眞人)을 지혜로서 느끼는 것이 깨침이다. 참 사람 앞에는 생노병사 모두가 손님일 뿐이다. 객진(客塵)이라 하여, 손님이 가고나면 티끌이 남게 되는데, 이 티끌이란 지나고 난 뒤에 남는 생각을 말 하는 것으로, 이 티끌 역시 손님의 것이다. 주인은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이하고, 또 보내면 되는 것이다. 쾌락 역시 손님이다. 손님이 오면 즐겁고, 가고나면 허전하다. 우리의 참 나는 주인이며, 살아가며 겪는 현상들인 생로병사는 손님이므로, 이들에 편안하고 여유롭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안락(安樂)이다. 편안함 즉 안락한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 할 것이며, 편안하지 못한 가운데 느끼는 즐거움을 행복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이 없는 참 나를 보고 생로병사를 맞이하는 것’이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로운 사람, 해로운 사람을 구분하게 되는 것은 나의 고락(苦樂)이 다른 사람에 매어있기 때문이다. 이로운 사람을 만나면 즐겁고, 해로운 사람을 만나면 괴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손님이라는 의미다. 해탈(解脫) 역시 다른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 속에서 생로병사에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아들 이라든지, 아버지라든지 하는 위치, 나고 죽음, 칭찬과 비방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손님이다. 손님은 오기도 하고, 또 떠나기 마련이므로 오고 가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편안히 보내면 되는 것이다. 참 지혜를 가지고 삶을 살면 삶의 기능과 생기가 함께 있게 된다. 밥을 먹는다던지 일을 한다든지 하는 것을 기능이라 하는데, 만약 이러한 기능에 생기가 없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식주의 쾌락 속에서 참 나의 지혜를 가지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심코 흘려보내지 말고 조용히 살피면서 순간순간을 진실히 보내면 참 나가 자연히 발견되고 느껴지는데, 그곳에서 편안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편안한 즐거움이 바로 행복이다. (참조: 종범 스님)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