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삶이란 늘 고달픈 고뇌의 연속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래도 배부르게 먹고 편안하게 잠 든 돼지가 아닌 슬퍼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필요한 것으로 사랑, 자신감 그리고 긍정적 사고일 것이고, 또 좋은 습관일 수 있는 일, 운동, 공부가 몸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남에게 감동을 주어 살맛나게 하는 것으로는 남들이 절실히 필요할 때 도울 줄 알고 남이 슬퍼할 때 그 슬픔을 같이하면서 진정으로 위로해 줄 줄 알고 가치 있는 사람을 올바르게 평가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살맛의 ‘살(live)'은 씨(種)와 알(卵)이 합성 된 ’씨 +알 = 씨알‘에서 ’씰‘, ’실‘, ’살‘로 된 모습을 건져낼 수 있으니, 종자가 싹이 터서 자신의 세대를 살고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려는 진행과정을 말해주는 것이 ’살(날 生=live)'임을 말해 준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살맛이란 그 속에 언제나 고뇌와 눈물이 깔려있고 그 결과 감동으로 이끌어 가는 모습을 말해준다.

 조선시대를 떠올릴 때면 거기에 늘 썩은 선비들의 당쟁이 저절로 딸려오게 되어 있지만, 그런 속에도 우리들에게 얼핏 머리를 스쳐가는 영조 임금의 탕평책(蕩平策)이라는 고뇌 어린 정책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뒷받침한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영조, 정조 양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채제공이다. 채제공이 두 왕으로부터 이처럼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은, 사도세자가 폐 세자 될 때 당시 도승지로 있던 채제공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나선 것이 그 시작이다. 채제공은 그 후 모친상을 당해 물러나 있을 때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았다. 영조는 정조에게 ‘채제공은 진실로 사심 없는 나의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채제공은 정조 재위기간 중 5년간 독상(獨相)을 지냈는데 조선 역사상 독상으로 있었던 인물은 채제공 외에 세종 때의 황희, 현종 때의 김수흥이 있을 뿐이다. 남인 출신 채제공이 노론들이 득세하고 있던 조정에서 5년씩이나 독상을 한 것은 국왕의 전폭적인 신뢰 이외에도 정적들의 용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채제공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을 넘나들며 합리적인 조정과 화해를 일궈나갔으며 또 당시 개혁의 선봉에 나섰던 실학파들의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정조의 숙원 사업이던 수원성 건축 때 채제공은 수원유수를 맡아 성곽 건축을 총 지휘했고, 저수지를 만들어 수원 일대의 농업을 활성화시켰다. 그는 또 인삼재배를 권장하고, 은화와 인삼의 통용을 추진하였으며, 국내 물자유통은 활성화시켰다. 이런 채제공이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한 때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채제공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정조가 공개한 문서가 ‘금동’이다. 금동이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문서로, 이 비밀문서를 금으로 봉한 궤에 보관했다는 뜻이고, 이 금동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채제공만 아는 비밀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만 으로는 딱히 살맛나는 이야기랄 것도 없는 훌륭한 명재상으로서의 치적을 열거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재상이 아닌 지방의 관리일 때 그의 속마음이자 진면목을 드러내 준 사건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무뢰배나 조폭이 있었다. 무뢰배는 부랑배와 불한당이 있는데, 부랑배는 일정한 거처 없이 돌아다니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고, 불한당(不汗黨)을 그야말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 즉, 떼 지어 다니면서 남의 재물을 탈취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협객을 자처했지만 실제로 협객과는 거리가 먼 양아치들이었다. 영조 때 평안도 감영의 천류고를 관리하는 창고지기 노비 장복선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천류고는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할 때 필요한 물품들과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의 여비와 조공품을 관리하는 창고였다. 장복선은 비록 노비였으니 위인이 호방하고 협기가 있어서 남이 어려움에 처하면 그냥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재물에 욕심이 없는 데다 술을 좋아해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돈이 없어 장가를 못가는 총각, 병이 나도 치료를 못하고 있는 퇴기, 부모상을 치루지 못하고 있는 빈민들, 조정의 환곡을 갚지 못하는 불쌍한 농민들 등 어려운 사람들을 오랫동안 도와왔다. 평양 내의 빈민이나 평민들 가운데 장복선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남의 일을 도운 인물이었다. 영조 51년 채제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왔다. 채제공이 평양에서 정무를 보던 중 천류고를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은이 2,000냥이나 부족했다. 채제공은 즉시 창고 관리인인 장복선을 잡아오라고 명한 후 심문하기 시작했다. 채제공의 추궁에 장복선은 대답 없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으나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국고를 축낸 액수가 너무 큰지라 장복선 에게는 사형판결이 떨어졌다. 판결 결과를 들은 장복선은 자신의 죄명이 횡령이라 하지 분연히 붓을 들어 그간 자신이 쓴 돈의 사용처를 낱낱이 기록했다. 기록에는 장복선 개인을 위하여 쓴 돈은 한 푼도 없었으며, 용처를 합산해 보니 은 2,000냥이 넘었다. 자신의 돈까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장복선이 돈의 용처를 기록한 것은 나랏돈을 자신이 착복했다는 누명을 벗기 위함이었다. 채제공은 장복선이 기록한 내용을 보고 고민에 싸였으나 죄가 중죄인데다 횡령 액수가 너무 커서 예정대로 사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장복선을 처형할 시각이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채제공은 관리들을 거느리고 처형 확인 차 형장에 좌정하자 사방에서 장복선을 살려달라는 청원이 빗발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복선을 살려달라고 혹은 빌고, 혹은 울면서 그의 구명을 호소했다. 채제공은 매우 놀랐으니 그렇다고 장복선을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채제공이 다시 한 번 예정대로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별안간 성장을 한 기생 100명이 위엄 있는 채제공이 앉아있던 당 근처에 몰려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장복선의 구명을 비는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100명이나 되는 기생들이 성장을 한 채 무릎을 꿇고 합창을 하는 모습은 보기 쉽지 않은 장관이었고, 군중들도 기생들을 따라 노래를 합창했다. 그 때 감영에 있던 장교 하나가 일어나 고리상자를 땅에 던지며 소리쳤다. ‘우리 모두 장복선을 살리기 위해 속전을 냅시다’. 장교의 외침을 들은 군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각자 가지고 있던 돈과 반지, 비녀, 패물 등속을 모조리 꺼내 고리상자에 던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고리상자에는 순식간에 돈과 패물이 쌓여 저울에 달아보니 1,000냥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 감동을 받은 채제공은 모자란 부분을 자신이 채워 넣고 장복선을 석방했다. 장복선을 위해 은을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이튿날 부족분이 모두 채워졌다. 평양 백성 모두가 장복선의 석방을 기뻐했고 채제공의 도량에 감읍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변화하게 되어 있으며, 그 변화가 인연과(因緣果)의 원리에 따르는 역사적 존재이다. 인(因)은 주체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을, 연(緣)은 객체나 간접적인 원인을, 과(果)는 인과 연이 서로 관계를 맺은 결과이니, 그 결과가 또 새로운 인이 되고 다시 연을 마나는 끊임없는 변화로 이어질 때, 살맛나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한 기폭제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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