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돌멩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금덩이일 수도 있고, 금덩이로 믿었던 것이 돌멩이일 수도 있다. 진국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하찮게 여기거나 믿지 못할 사람으로 여겼던 사람이 뜻밖에 참으로 나에게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거기서 큰 신뢰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을 잘 못 알았을 수도 있고 알면서도 일부러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서구인들의 ‘믿음(belief’)이란 소망하고(desire) 사랑한다(love)는 의미이고, 우리말의 ‘믿음’이란 바탕(밑)이 굳다는 것이니 굳건한 ‘밑바탕’에서 보여주는 응집성 또는 집적성(集積性)이 믿음의 근간이 된다는 말이다. 하여간 믿음이란 우리가 돌멩이로 믿었던 것이 금덩이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점과, 그것도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본질에, 그리고 거죽이 아니라 본질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세가 믿음의 본질이 될 것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인도(India)에서 연수 유학하면서 그 곳의 뿌리문화 힌두교에 대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했지만 단편적으로나마 그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오랜 전통문화, 환인, 환웅, 딘군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신교(神敎)문화는 내면적으로는 조선조에 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그 명맥을 사라지지 않았다. 외형으로는 천주교, 개신교(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으로 분리된 것 같지만 여전히 한국인은 한국인인지라 전통 종교인 신교(神敎)의 뿌리는 여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가 아는 고대국가 배달국(神市時代 18 환웅 1565년 존속)의 환웅이 세운 가르침이 잠깐 인도로 나들이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거친 다음 ‘불교’ 라는 겉포장만 바꾼 채 다시 삼국시대에 본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로 돌아 온 이후 그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 곁에 와 있지만, 여전히 환웅의 가르침이 근원이라는 데서 사찰의 본당은 환웅(桓雄)의 웅(雄)을 딴 대웅전(大雄殿)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도 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석가가 가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인 왕은 아들을 순수한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어린 왕자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할 여러 가지 보호 장치를 하였건만 멀지 않아 그 보호막이 무너지게 된다. 여는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왕자는 어느 날 궁전 근처의 동산으로 말을 타고 가다가 네 가지 장면이 눈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병자와 허리 꼬부라진 노인과 죽은 시체였다.
 이 장면이야 말로 인생살이의 전부이고 이제 이 생로병사야말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그에게 다가 온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장면이 있었으니 한 출가 수행자의 평온한 모습이다. 이로서 그의 마음이 결정되자, 집과 행복과 안정된 세계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문 밖에 거처하면서 인간 윤회의 원인이며 모든 인간을 괴롭히는 생(生)과 고(苦)와 사(死)의 바퀴를 깨뜨리기 위한 영적 수행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그는 갠지스 강 유역에서 여러 지역에 걸친 영적 스승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엄격한 고행에 앞서 이들의 제자가 되기도 한다. 육년 동안 뜨거운 태양과 살을 에이는 혹독한 비바람 속에 벌거벗고 앉아 있거나 하는 금식과 금욕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던 그는 그 혹심한 고행을 접고 적당히 음식을 섭취하면서 명상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외떨어진 곳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영적인 광명을 얻게 된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 얼마간 따라다녔던 유혹 ‘그대는 아직 젊고 단단한 육체를 가졌다. 가서 그대의 달콤함을 즐겨라. 이 거친 사막에는 사람도 얼마 없으며 맹수 떼들이 먹이를 찾고 있다. 그대의 안전이 염려스럽구나.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 그대의 궁전으로 돌아가라. 그토록 그대가 발견하기 어려운 지혜일랑 더 이상 헤매지 말라. 현재의 의문일랑 잊어버리고 인생의 쾌락에 몸을 던져라’에 이미 초월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기도 하다.
 붓다는 또 사람을 많이 죽이고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손가락뼈를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살인강도와 마주치게 된다. 붓다를 죽여 강도질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강도가 아무리 다가가도 붓다는 여전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마침내 살인자는 포기하고 그 스승에게 엎드려 도덕적인 가르침을 들은 뒤에 제자의 한 사람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새로운 승려를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붓다는 그가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새로운 사람임을 인식시킨다.
 
 사람이 윤회의 고리를 깨고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 붓다에게서 죽음의 정복이란 다시는 어떤 육체로도 이 땅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자,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 끝날 때 까지도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육체적인 부활이나 승천 같은 것은 없고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부터의 해방이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그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채포(採捕)하던 초기 단계에서 농경사회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단계가 있다.
 모든 인류는 예외가 없다 해도 좋을 정도로 동물들을 신에게 제물로 올려 그 희생 제사를 통해 그들의 생계가 보장되고 더 많은 산출을 기원해 왔다. 지금은 농업만이 아닌 상업과 제조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직종으로 전환된 단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곡식이나 짐승이 아닌 몸과 마음을 바치는 믿음의 터전을 붓다가 우리 인류에게 선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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