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류의 역사에는 크고 작은 전쟁사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기록들이 많다. 불과 180명라는 작은 병력을 이끌고 7만 명을 거느리고 왔던 남미 잉카제국 왕 알타왈파를 사로잡은 스페인의 피사로는 국왕이 24톤이나 되는 금을 몸값으로 내어 놓겠다 하자 그대로 약조하고 약속대로 금을 스페인군에게 인도하자 약속의 이행은커녕 곧바로 왕이 처형(1533년)됨으로써 잉카제국의 찬란한 문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또 잉카의 본거지 페루와 가까운 칠레는 수십 번에 걸쳐 이웃 강적 아르헨티나와 페루를 상대로 싸움을 일으켜 거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원래 아주 작은 나라였던 칠레가 자꾸만 태평양 해안 북쪽 방향으로 뻗어나가 오늘처럼 매우 길 다란 국토를 가지게 되었다. 칠레와 멀지 않은 파라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동맹국을 상대로 싸움을 일으켜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이과수 폭포를 포함한 국토의 3분의 2 정도를 잃고, 분이 풀리지 않자 만만한 볼리비아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 전 국민이 다 죽을 대 까지 싸우겠다는 불굴의 투지 앞에 굴복한 볼리비아가 현재 파라과이 영도의 절반 정도 크기가 될 정도를 양보했다. 또 그리 오래지 않는 일이지만 페루와 에콰도르 간에 전쟁이 일어나 교전 끝에 단 두 명의 전사자를 낸 에콰도르가 상대의 조건을 다 들어주면서 싱겁게 전쟁이 끝이 났으니 종전 영토에서 3분의 1을 넘겨 준 것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 각 제후국 중 제일 먼저 패자(覇者)로 등장한 제 환공(濟桓公)은 그의 장자인 소(昭)를 송(宋)의 양공(襄公)에게 인질이 아닌 유학을 보냈다. 제환공이 죽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혼란 중 송양공은 자신이 맡았던 소(昭)를 제왕(濟王)을 올리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했다. 힘이 약한 송나라였지만 제나라 군은 힘써 싸우려 하지 않았다. 군대도 장군도 한 낱 간신배들이 정권을 잡고 흔드는 꼴이 역겨워 힘써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간신들이 옹립한 무궤(無詭)를 위하여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나라 사람들은 침략군과 싸울 생각도 없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는 무궤를 죽였다. 무궤가 죽자 소가 자동적으로 즉위할 것으로 보고 송양공은 귀국했다. 하지만 다시 왕자들 간에 왕위 쟁탈정리 벌어지면서 소가 다시 송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자 송양공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이기고 소를 제 나라 왕(효공)으로 즉위시켰다. 기세가 오른 송양공에게 패자가 되어보려던 꿈이 꿈틀거릴 무렵, 초나라와 송 나라간의 전쟁에 송이 패하고 송양공이 포로가 되어 억류된 일이 있어 그에게는 치욕에 대한 앙심이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웃 정(鄭) 나라가 초나라에 항복을 하자 더욱 화가 난 송양공은 송나라의 영역에서 흐르는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초나라와의 전쟁이 돌입하게 되었다. 초나라는 워낙 군사력이 강하여 송나라가 정면으로 대결했다가는 승산이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송나라는 홍수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의 도하작전에는 먼저 강을 건너는 쪽이 적의 저격을 당할 염려가 있어 불리하게 되어있다. 초나라는 원체 병력이 많은지라 이를 믿고 먼저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신하들이 송양공에게 적의 허점을 노려 공격하자고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그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초나라 군사는 도강을 완료하여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양공은 이때에야 겨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어서, 중과부적으로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양공의 좌우에 호위하던 친위대 까지도 전멸하였다. 송나라 사람들이 양공을 원망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군자는 부상자를 공격하지 않으며, 늙은이를 포로로 하지 않는 법이다. 좁은 길목이나 강 가운데서 이기려 하는 것은 옛 어진 사람들의 취할 바가 아니다. 내 비록 망국 은(殷)나라의 후예지만 대오를 정비하기 전에 공격 명령을 내리는 그 따위 치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자 신하들은 ‘병법은 이기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 전쟁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군자는 부상자를 공격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애당초 전쟁을 벌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라고 송양공을 원망했다. 양공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다음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송양(宋襄)의 인(仁 )’이란 고사성어로 남은 쓸쓸한 비웃음뿐이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아무런 대책도 없고 어처구니없는 전쟁이 없는 치욕적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누구보다 국제정세에 밝았던 영민한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이런 허망한 전쟁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혹 전쟁이 났더라도 이렇게 무참히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 롯데호텔 뒤편에 석촌 호수가 있고 이 호수 뒤편 삼전동 방향으로 공원이 하나 있으며, 그 곳에 대리석으로 된 높이 395 cm의 돌 비석 하나가 있다. 이 비가 청 태종의 승전을 칭송한 이른바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이 비는 여러 번 땅 속에 묻혔다가 파내기도 한 우여곡절 끝에 그 자리에 서 있다. 호란의 바로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에서 적에게 끌려간 포로가 수  만 명 정도인데 비해 병자호란으로 청국에 끌려간 포로의 수는 60만에 이른다. 청은 포로들의 속환금을 받을 생각과 함께 만주의 인구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잡아간 것이다. 호송 도중 볼일을 보고 싶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 데서나 옷을 내리고 볼일을 봐야 했고, 가다가 병이 들거나 하면 가차 없이 버리고 가거나 죽이기가 예사였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귀에 구멍을 뚫고 한데 묶어 끌고 갔다. 끌려간 포로 중에는 양반 집 가족들도 많았다. 돈 많은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은 자기네 가족들을 속환하는 데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영의정인 김 류는 첩의 딸이 끌려간 것을 알고 역관 정 명수 에게 1,000냥(쌀 200석 상당)을 바치고 돌아오게 하는 바람에 포로 값이 올라 숫한 포로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쟁 직후의 몸값 10냥에 비해 100배로 오른 것이다. 나라의 공금으로 포로들을 속환한 일도 있으나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공노비로 전락하였고, 오히려 청에서 살겠다고 자원할 정도였다고 하니 참으로 도무지 말이 안 나오는 패전의 참극이다. 20만이나 되는 여자 포로들은 대개 가난한 집의 딸들이라 돈을 주고 풀려난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다. 청에서 노예로 살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고국 땅을 밟은 여인들은 남의 손가락질과 남편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매어 자살하는 일이 빈번했다. 자신의 여자 하나 지켜내지 못했던 조선이 무슨 염치로 환향녀들을 멸시해서 죽게까지 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하기 전 세력이 미약했을 때 적 부족의 침입을 받고 처인 보르테를 놓아두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둘이 같이 도망쳤다간 둘 다 잡혀서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인 보르테가 자청해서 남아 징기스칸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다. 보르테는 잡혀가서 적 부족의 부족장 집안의 사내에게 주어져 살다보니 임신을 하게 되었다. 징기스칸이 겨우 동맹 세력을 모아 적 부족을 격파하고 처를 되찾았을 때 임신한 그녀를 본 그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내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이든 내 첫째 아들이 될 것이다’.
 병자호란의 패전에 따른 비참하고 우울한 사실은 잊고 싶은 비극이지만 그냥 잊기만 해서는 우리 자신들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반드시 장래 우리들에게 뼈저린 삶의 교훈으로 다가와야 할 일임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일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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