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중국의 삼국시대에 익주(지금의 사천성)를 중심으로 한 촉한(蜀漢)의 왕이 된 유비(劉備)에게는 유명한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의형제로 맺은 의제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있었다. 동쪽 형주에서 서쪽 익주로 진출하여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닦기에 여념이 없던 유비는 믿음직한 의제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있었다. 동쪽의 오나라는 관우가 무서워 공격을 못하고 있다가 북쪽의 위나라와 촉한의 관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서 촉군(관우)이 발목이 잡혀있는 가운데 오나라에서는 수군도독 주유, 노숙에 이어 여몽이 도독으로 있었다. 여몽은 스스로 사직하고 육손이라는 젊은이를 도독으로 추천한 뒤 물러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관우는 육손 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위군과의 싸움에만 열중하면서 위군을 전멸시키고 적장 우금과 방덕을 사로잡아 기세를 올렸다. 이어 위군의 새로운 장수 서황을 맞아 싸우고 있던 중 후방에서 오군의 공격을 받아 형주를 뺏기게 되자 군을 철수하여 돌아가다가 곳곳의 매복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관우가 굳게 믿은 것은 장강변의 곳곳에 설치된 봉화대인데 이 봉화대가 적(오군)의 기습을 받아 그들의 주중에 떨어지니 위급상황을 관우에게 전할 길이 끊긴 것이다. 오군의 수군도독이었던 여몽은 물러나는 체 하면서 실은 소형선들로 백제의 상선으로 위장하여 봉화대에 접근하자 봉화대 수비병들이 별로 의심하지 않고 경계를 늦춘 것이 사단이 된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을 슬쩍 빼어버렸지만 여몽의 속임수는 ‘백제’였던 것이다. 당시의 백제는 단순히 중국과의 무역 대상으로가 아닌 양자강 일대를 장악한 해상 강국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 후 사랑하는 혈맹의 의제 관우를 잃은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총동원령을 내려 오나라를 공격하려던 중 또 다른 의제 장비가 부하들의 손에 비명횡사하는 사건을 맞게 되었다. 제갈양, 조운 등 다른 신하들이 오나라와 동맹하고 위나라를 치자는 강력한 설득을 물리친 채 유비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기세가 오른 촉군은 관우와 장비의 원수들을 모두 죽이고 승세를 타면서 공격해 들어갔으나 오나라의 젊은 수군 도독 육손에게 대패하여 퇴각한 유비는 백제성(百濟城)에서 제갈양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이 백제성 또한 강력한 해상왕국 백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년에 가까운 우리의 기록역사가 흘러 온 과정에 한 번이라고 바다를 제패한 해상왕국이 있었던가 하고 되돌아 볼 때 우리는 늘 신라의 장보고(張保皐)를 떠올리곤 한다. 실은 이보다 수백 년 전에 해상을 제패한 나라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사서가 아닌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이 한 결 같이 말해주는 ‘백가제해(百家濟海=百濟)’의 주인공 백제를 빼 놓을 수 없다. 지금의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강력한 고구려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싸워가며 국토를 넓혀 나가고 있을 때 백제는 호남. 충청 지역에 국한된 소국에 불과한 나라였던 것으로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고 또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실은 지금의 산동 반도 이남의 넓고 알찬 지역, 우리나라 충청. 호남지역, 그리고 지금의 일본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해양국가 이었음을 빼놓고 하는 말이다. 백제13대왕인 근초고왕 때 백제 내부는 물론 영토인 요서(지금의 중국)와 일본에 걸쳐 동원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고구려 원정길에 올라 고구려의 남평양 전투에서 고구려 국왕인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 이 강력한 해상왕국의 위용을 말해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백제 고이왕(246년)이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현을 공격하였고, 이어 분서왕 때에 낙랑현을 빼앗았다. 요서와 진평을 점령한 백제는 중국 해안선을 따라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동성왕(479-501년) 때에 북경 지역과 상동성, 상해와 양자강 이남까지, 중국 동부 지역과 황해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제국을 이루어 내었다. 이들 왕 중 분서왕(汾西王)은 지금의 한반도 쪽에는 관심이 적은 반면 광활한 중국 영토를 모두 백제 땅으로 가지려는 야심에 불 타 있었기에 서토(西土=中國)의 ‘서(西)’자가 붙은 분서왕이 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낙랑이란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고 지금 중국의 갈석산을 동부 경계로 한 중국 내부 지역임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경제대국이 된 백제는 일본을 위성국으로 다스렸는데, 일본 나라현 텐리(天里)시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백제 진지왕이 왜국의 진구(神功)왕후에게 질지도(七支刀)를 하사한 일을 지금의 일인들은 이 칠지도를 백제 왕이 진구왕후에게 바친 것으로 비틀어 적어놓고 있다. 이 칠지도는 세계수(世界樹)이자 태양을 뜻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이나 고구려와는 별도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의 삼국을 통일한 진(晉)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왕조였고 단명한 왕조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남으로 밀린 동진이 백제의 힘을 빌려 북방을 수복하려는 생각에서 중국 동부 지역을 관장하는 백제의 장수와 관리들에게 명색뿐인 관직을 주기도 했는데 이는 한족과 토착인들을 통치할 명분이 되기도 했다. 백제 동성왕(489-490년) 때에 후위(後魏)의 기병 수십만이 백제의 대륙 점령지에 침공해 왔다가 대패하고 돌아간 일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고구려 유민 장수가 이정기(李正己763-819년)다. 그는 반란 진압에서 얻은 세력을 기반으로 옛 백제의 중국 영토였던 산동 도 이남의 땅을 차지한 것이다. 국세가 기운 당나라의 절도사가 된 이정기는 소금과 철, 농산물이 풍부한 중원 경계부의 심장부를 차지한 것이다. 이정기는 부역과 세금을 균등히 하고  정령(政令)을 엄히 하면서 삽시간에 사실상의 독립국인 강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정기의 십만 대군이 당시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가는 길목인 제음(濟陰)에 집결하자 이에 맞서는 당은 변주(卞州 =開封)에 성을 쌓고 대비하였다. 결전의 때가 되자 양측은 장안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운하의 길목인 용교(埇橋 지금의 宿州)와 와구(窩口)에 군대를 보내의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이 때 대진국(발해) 문황제가 군을 보내어 이정기를 도왔다. 이에 힘입은 이정기는 당군을 연파하고 응교.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 운하의 물산 운수를 완전히 두절시켰다. 이 후 쇠퇴의 길로 들어선 이정기는 그의 손자 이사도 때에 이르러 당나라 편을 든 장보고 등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장보고에게 해상왕국의 자리를 물려주기에 이르렀다.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의 손 안에 있던 지금의 황해바다가 통일신라 때에 이르러 ‘신라방’이란 초라한 이름만 남긴 채 사라져 간 것이다. 반드시 옛 주인인 우리가 되찾아야 할 바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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