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말에서 ‘선비’라 하면 ‘어질고 지식 있는 사람’ 정도로 뜻풀이 한다.
 ‘선비’의 ‘선’이란 ‘산(솟은)’ 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 다리 사이가 ‘솟은’ 아이인 남자 아이란 말이고 ‘솟 아이’가 ‘산 아이’로 되고 나아가 오늘의 ‘사나이’, ‘사내’가 된 것이니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뜻이자 ‘사람’, ‘살다’, ‘사랑하다’ 등과 동근어가 된다. 또 ‘선비’의 ‘비’ 또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바보’, ‘흥보’, ‘느림보’, ‘혹부리’, ‘악바리’, ‘비바리’, ‘군(軍)바리’, ‘쪽 바리’, 등에서 보여주는 ‘보, 비’ 등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라는 말이 생각난다. 선비란 평생 독서와 자기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 무소유의 덕을 지닌 인격자일 뿐 아니라, 위태로움을 당하여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칠 줄 알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하고,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하고, 자신이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으며,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루어 내면서도, 때가 올 때 까지는 숨어 살 줄 아는 것이 선비의 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배움’과 깨달음으로만 살다가 때가 올 때 조용히 하늘의 부름에 따르는 것이 사람다운, 또 선비다운 삶이라는 말이다.
 ‘배움’의 ‘배’란 ‘부르다(呼)’, ‘말발’, ‘거짓부렁’ 등에서 보여 주는 ‘배,비,부(말 言)’ 이 보여 주듯 ‘말’ 이란 뜻이고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길도 ‘말’을 통하여 전달되고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선비로서의 출발에서 성인(聖人)으로 완성시켜 가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게으름이나 중단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죽을 때 까지 잠시라도 포기할 수 없는 학문의 길이 사람의 갈 길인 이상, 이를 버린다면 곧 바로 금수(禽獸)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면에서는 학문의 최고 극치가 예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도덕의 극치로 나가는 단계이기도 하다. 학문의 길이란 귀로 들어 마음에 새기고 온 몸에 가득 퍼져 그의 행동에서 모든 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한 가지 거동이나 한 마디 말에도 절도가 있어 모든 사람에게 법칙으로 다가오는 길로 이끌게 될 것이다.
 학문에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겨우 네 치 정도 밖에 안 되는 입과 귀 사이에 불과해서인지 귀로 들은 것이 곧 바로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만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학문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배움의 자세에서 비롯된 학문이라면 그것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꾸며주지만 배움의 자세가 안 된 학문은 그것으로 자신을 짐승으로 만들게 될 것이고, 남이 묻기도 전에 먼저 발설하니 이는 오만한 것이오, 남이 한 번 묻는데 두 가지를 대답하니 이는 수다스러운 것이다. 오만한 것도 수다스러운 것도 모두 좋은 일은 아니니, 함축성이 있되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의 없이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도 하지 말고, 예의 없이 말하는 자에게는 묻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 예의 없이 담론하는 자의 말도 듣지 말고 다투기를 잘 하는 사람과는 변론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따라서 도(道)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을 안후에야 접근할 것이오,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피해야 될 일인 것이다. 예와 공경함이 갖추어진 뒤에야 함께 도의 방법을 논할 수 있고, 말씨가 온순한 뒤에야 함께 도의 방법을 논할 수 있고, 말씨가 온순한 뒤에야 도의 원리를 말할 수 있으며, 표정이 공손한 뒤에야 함께 도의 극치를 말 할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함께 말할 상대가 못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오만하다하고 하고, 더불어 말할만한 상대인데 말하지 않는 것을 음흉하다고 하며, 상대방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눈 뜬 장님이라 할 만한 일이다. 오만하지 않고 음흉스럽지 않고 눈 뜬 장님이 아닌 선비의 길이란 ‘서두르지 않고 게으름도 없이 순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참 선비의 길을 이름일 것이다.

 열 번 총을 쏘아 한 번이라고 과녁에서 빗나갔다면 결코 명사수라 할 일이 아니듯, 천 그램(천 gram)이 필요할 때 구백구십구 그램이 될지라도 부족함은 사실이다. 학문의 길과 예(禮)의 터득 또한 같은 것이어서 유추(類推)의 능력이 없어서는 그 밖의 사물에 통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인의(仁義)를 하나로 꿰뚫지 못하고서는 학문을 잘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학문으로 나아가는 사상에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어야 할 일이다.
 학문의 길은 거듭 외우고 이를 꿰뚫어 사색으로 통달하고, 훌륭한 스승을 사사(師事)하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학문의 장애를 제거하여 이를 보전하면서 더욱 더 길러 갈 일이다. 올바른 학문이 아니라면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귀로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입으로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할 일이며, 마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학문의 길로 나아갈 때 눈은 오색(五色)을 보듯 기쁘고, 귀는 다섯 가지 소리를 듣는 듯이 즐거우며, 입은 다섯 가지 맛을 느끼는 듯 달고, 마음은 천하를 얻은 듯한 만족감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선(善)을 쌓으면 덕(德)이 이루어져 마음의 예지가 스스로 터득되면서 성스러움이 마음에 가득할 것이다. 반걸음이라도 발을 떼지 않고서는 천리 길을 가 닿을 수 없고 작은 여울이 모이지 않고서는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잘 달리는 말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을 갈 수 없겠지만 둔한 말이라도 열 걸음을 뗀다면 날랜 말을 따라 갈 수 있으니, 성공이란 중단하지 않는데 있음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자르다 버려두면 썩은 나무라도 자를 수 없지만 다듬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쇠나 돌이라도 아로새길 수 있다는 말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뜻이 없는 사람에게 밝은 깨달음이 멀어져 가 듯, 묵묵히 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시에 두 길을 가는 사람은 영원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듯이 한 눈으로 두 가지 물건을 분명하고 똑똑하게 보기 어렵고, 두 가지 소리를 동시에 맑고 똑똑하게 듣기 어렵게 된다는 데서, 선비가 가야 할 학문의 길이란 단순 소박하면서도 구부러지거나 막힘없이 자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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