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시사평론가
 혹여 어설픈 글쟁이 흉내 자는 필자에게 정형화(?)된 글을 안 쓴다고 떫어할 수도 있겠다. 지역지에까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시간도 없다. 또한 글로써 존재를 내세울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본지에 기고는 해도 구독하지 않기에 고향에서 보니 기고문 여백에는 필자의 간략한 프로필이 있어 만류했기에 모르겠다. 시정되리라 믿는다. 원하지 않았던 바다.
본지에 기고함은 지역독자들에 대한 봉사다. 어떠한 형태를 불문하고 글을 쓸 수 있으나, 이곳에서는 시류를 논하고 싶을 뿐임을 독자들은 이해했으면 한다. 그러나 분명, 행간 행간에서 우리들의 삶과 세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심을 숨기면서 토하고 싶지 않다. 다시 한 주간의 시론을 여기에 옮긴다.

 *가끔은 고향에서 만나거나 이러한 전화를 제법 받는다. "개나 소나 (고을원님 선거에) 다 나온다." 고 일갈한다. 이에 "본인이 나가 보시라. 오히려 19명의 오르락내리락하는 후보군보다 낫습니다." 에 "공천 주나!" 라고 맞받아친다. 필자에게 "당신도 새누리당 아닌가?" 고 묻는다. "맞다. 그러나 아무 감투를 가지지 않는 평당원일 뿐이다." 고 응수한다.
깃대 선거판에서는 그게 관건인 모양이다. 아무튼 일단은 침묵하지만, 토호를 넘어 토적들이 돈까지 거머쥐고 봉사를 가장한 채 권력까지 탐하려는 모양새도 보인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모리배는 없어야 하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자신의 분수나 능력조차 모르고 탐욕에 찬 이도 있어 보인다. 진짜 짠돌이 성향이 능력유무를 떠나 가면은 잘 쓴다. 또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참신한 인물은 없어 보인다. 탐하는 자들이 여태까지는 무엇했는지 모르겠다. 진정, 민을 위할 인물은 영원한 숙제일까.

 *모 국회의원을 어느 정당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 이라고 상대 정당과 네티즌들이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이에 나는 "공안검사 출신인 게 자랑스러운 중년 사내인 강원도 국개원 X태 파이팅! 참, 잘 어울리는 감투로다. 아, 나도 이 순간만은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싶다." 고 일갈했다.

 *굳이 한국에 살 필요가 있을까? 영혼 없는 부정의한 삶만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상이니 희망이 없어 보인다. 국개원, 병역미필자, 친일의 잡피를 물러 받은 후세, 극우세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궁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도 이들에게 피를 빨리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사다리가 없고, 정직하면 짓밟히는 사회 아냐. 이에다 대한민국 파지 줍는 노인이 되기 싫은 거다.
 전자에 열거한 삶 아니면 이 꼴에서 못 벗어나는 형국이 아닐까. 거리에 버려진 파지를 주워 2000원 번다. 이틀에 저가 담배 한 곽 사 피우면 딱 맞다. 이 세금 착취해 누수가 되고, 기업들만 살을 찌우니 나도 대한민국 노인이 되는 게 무섭다.

 *'1987년 7월9일 대한민국 광장'이란 제하에 이렇게 쓰다. 28년 전 어제, 저 군중 속에 신사복에다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그때 연세대로 옮겨지는 이한열의 상여 뒤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이때 시위에 참여한 넥타이 부대원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직장에서 해고되는 이가 제법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629항복 선언에 이르렀어도 서울의 각 경찰서는 체포돼 온 이로 만원이었다. 일명 뺑끼통에 오줌을 누고, 철창 속 많은 이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똥을 쏴야했다. 그리고 양은도시락에 콩과 보리가 섞여 나왔다.
 대공과 순사들에게 취조를 당했다. 외부와는 연락이 차단됐다. 엮어 넣으려고 집 서재의 약도를 그리게 했다. 이유는 금서가 발견되면 국가보안법 등으로 엮을 참이었다. 금서는커녕 칼-막스 책조차 한 권 나오지 않자 그들은 허탈해 했다. 그때 태어난 새끼가 과년한 처녀가 됐다.
참, 세월은 빠르다. 저 역사의 군중 속에 내 젊음이 있었단 사실에 뿌듯하다. 법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도 군사독재정권의 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념 따위는 멀었다. 단지 '로우=져스티스'에 충실했기에 섰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내 행방을 알려준 이는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의 시녀가 된 동창 몇 명이 있는데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지금도 호의호식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그 시절이 도래한다 해도 이제, 내가 다시 서려해도 중늙은이가 됐다.
 그때 빵(?) 동기이자 그나나나 넥타이부대원이었던 여의도가 증권맨이었던 동년배 그 청년이 보고 싶다. 그도 내만큼 늙어가겠다. 불의에 당당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정의감에 내 스스로에게 지금도 박수를 친다. 석방되던 날, 두부를 나누어주던 이름 모를 민주시민들도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함께하고 싶다.

 *고향과 진주의 벗들을 만나기 위해 고속버스에 육중한 내 몸을 실었다. 휴게소에서 내가 피우는 담배를 사려니 정부시책상 외제 담배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건 흡연자의 완전한 인권침해다. 내게 진정한 협연권을 달란 거다. 금연권만 상책이 아니다. 작년 상반기 비교 1조2천억이란 담뱃세에 기여하고도 무슨 냉대란 말인가.
 인상 전, 피우던 담배가 2100원이었다. 그 담배가 없으면 대용으로 2000원짜리를 태우기도 했다. 80%인상이 아닌 100%인상이었기에 독일산 담배로 바꾸고는 금년부터는 항공편도 국적기는 이용을 않는다. 돌대가리 탁상론자 부처나 기자들은 면밀한 현장파악도 없이 무조건 80%인상이라고 변죽을 울렸다. 협연권 말살에 강요된 애국심까지 발휘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땅의 일용근로자나 노인들을 위해 저가담배만은 원래의 가격대로 인하해야 한다. 이들에겐 담배 한 개비 피우는 게 낙이다. 그 낙까지 빼앗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흡연자의 건강타령 마라. 부패공화국이 내 건강과 죽음까지 책임지는 목지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영양가 없이 바쁘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니 더운 날씨가 더해 피곤하다. 자정 넘어 귀가하니 삭신이 아려온다. 원고도 보내야 하고, 기고도 해야 하는데 파뿌리가 된다. 종로에서 지인들과 저녁식사 후 땀도 많이 흘린 탓에 8시경 귀가하려니 전화벨이 울린다. 소싯적 소꿉놀이 때 갑순이었겠다. "선배(실상은 동갑이다), 얼굴 한 번 보자. 비행기가 결항돼 ktx 21:30 서울역 도착이다" 어찌, 청을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촌녀(?)가 서울 온다는데...
 택시로 영등포에 가 또 다른 갑순이랑 셋이서 한 잔 하다. 이 친구들이 술이 내보다 세다. 그녀들의 만남에 사진을 찍어 달래기에 셔터를 눌린다. 나이에 비해 10년은 젊다. 그러면서 소싯적 생각에 젖다. 인생무상까지는 아니지만, 세월은 덧없음이다.
 내도 모르는 사이 내 모습도 찍어 또 다른 갑순이에게 보내면서 "와, 이리 미남으로 잘 나오노! 그리고 눈웃음 짓는 모습이 옛적에 많이 울렸겠다.""어, 아냐. 난 석남이었어! 예전 순둥이 때와 변함이 없었어!"한바탕 웃는다. 그녀에게 지난겨울, 꼴에 내가 창원에서 노래방을 빌려 강의기법(?)을 밤새껏 가르친 적이 있다. 드디어 서울에서 시연을 한단다. "내가 화법까지 가르쳤으니 객석에 앉아야 않겠냐?""어~어, 얼어서 못해 선배 오지 마!"낼, 그녀의 강연하는 모습을 보고픈 밤은 간다.

 *객지 벗 25년에 네 살 위 직장동료이자 친구가 스님으로 변신해 내 앞에 섰다. 소식 두절이었다가 2년 전 15년 만에 해후했다. 직장에서는 내가 상사이자 사수였고 서로 간은 존대를 않던 사이였다. 그리고 가족 간도 방문한 사이였고, 그는 돈도 꽤 벌어 미국 이민을 갔다가 가족을 남긴 채 역이민이다.
 세월은 흘러 나는 문사로, 그는 스님으로 변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만나니 "너 이 자식아! 이젠 존대하고 스님으로 예우하라!" 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그게 안 된다. 방어막을 치니 예전같이 어울리는 게 쉽지 않다. 그러한 나머지 또 다른 지인들에게 그와의 관계설정에 대해 조언을 구하니 대체적으로 속세에서는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는 게 좋다는 평이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