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 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것은 동해용왕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 주어서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 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그의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주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워서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한 끝에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처용의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 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앞으로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나라 사람들은 이 후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무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이하게 되었다.
 위에서 처용이 부른 노래를 현대어로 풀어쓰면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이니, 무당이자 주술의 대가인 처용이 질병을 옮기는 역신이 아내에게 범하려는 것을 처용이 노래와 춤으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로 풀어야 할 일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처용의 아내가 샛서방을 끌어들인 간통사건 같이 보이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아 역병을 물리친 처용의 주술적 행동이었던 것으로 풀어야 할 일인 것이다.

 여기서 처용이 말하는 ‘놀다. 노니(닐)다’ 등은 더 나아가면 ‘노래(놀애)’가 되고 글을 ‘읽다’가 ‘니르다(말하다), ’일러(닐러)‘ 바치다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 ’놀다‘ ’니르다(읽다)‘ 등은 말(言)의 뜻을 가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주술사)과 신과의 의사소통 수단임을 말해 주기도 한다. 이 ’노래(놀이)‘는 ’‘소리(말)’가 되기도 한다. 기쁘게 노래하고 논다는 의미는 그대로이면서 ‘소리’의 ‘소’가 ‘쉬’로 되면서 ‘쉬다(기쁘고 즐겁다)’로 분화되기도 한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니 ?’ ‘하루 놀고 하루 쉬며 지내죠’ ‘팔자가 늘어졌군’. 이런 대화쯤 언제라도 오갈 수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느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安息) 하시니라 하느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느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였음 이더라’ 처럼 성경에서도 ‘안식(쉼)’ 도한 천지만물 창조의 한 중요한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여 영원히 관리하고 주관할 하느님이 일에 지친 끝에 휴식시간을 가졌을 리 없지만 인간에게는 ‘쉼(기쁨)’을 얻는 지혜를 가르쳐 새로운 힘으로 일터에 나가라는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처용의 놀고 쉬는 것은 모두 일이었던 반면 오늘의 ‘놀이’ 또는 ‘쉼’은 일과는 거리가 먼 그냥 일 안하는 것이 ‘놀기’이자 ‘쉬기’로 풀이되니 결국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일을 안 하고도 늘 밥상이 차려져 나오고 잠자리가 마련돼 있고 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불평을 늘어놓기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놀지도 않고 쉬는 시간을 아껴가며 나를 위해 일해주고 있다는 고마움을 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이 의무로 지워지고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면서 ‘일’ 자체가 지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일’ 자체를 즐거움으로 승화시켜 낙원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수 있는 지혜가 무엇보다 인생의 중요 과제임을 말해준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신체나 정신에 다 같이 유익한 것이 되고 인간의 행복에 최대한 봉사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바로 그 노동에서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도 자각하지 못한다면 노동은 단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고된 의무로 생각될 것이고, 인생은 맹목적인 것, 지옥같이 괴롭기만 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너무 성급하게 성과만을 서두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마음에 끊임없이 반성과 검토의 여유를 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갈 일이다. 오늘 할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내일 할 일은 그 다음 내일로 E 미루게 되며, 모든 일이 자꾸 밀리게 된다. 남이 성공한 것을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은 운이 좋았다’라고 간단하게 평가하는 나쁜 버릇에 빠져들기 쉽지만, 어떤 성공이든 운수만으로 성공도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기 쉽다는 말이다. 게으른 사람은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가 없다. 또 그 게으름의 대가로 불성공만이 아니라 자기 대신에 성공한 타인을 보고 부럽게 생각해야 하는 고통마저 따르게 된다. 성공한 사람이 같은 또래의 친구인 경우에는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번민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후배나 어린 사람일 경우 그 정도가 더 할 수도 있다. 무엇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뒤에 인내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수단을 찾아낼 때 까지 끊임없이 갈고 또 갈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 노동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이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락하게 휴식하는 기쁨도 커지며 그 노동에서 얻은 보수로 더 큰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생활의 걱정이 없다고 해서 매일매일 놀고 지내기만 하면 안락이나 휴식의 기쁨과 인생의 기쁨을 느낄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다. ‘놀며 쉬며’의 ‘놀며’의 자리를 ‘일하며’가 차지할 때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위험한 때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역경으로 고통 받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은 때라는 것도 잊기 쉽다는 점을 곱씹어 새겨두고 싶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자칫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고 자신의 신변에 대해 주의가 등한시되기 쉽다는 말이다. 역경이나 실패에 짓눌려 절망에 까지 이른다면 이것이 다시 역경을 초래하게 되고 이것이 연속될 때 실패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도 있다. 한 나라의 부(富) 또는 강성함은 열성적으로 일 하려는 국민들의 수에 달렸다는 점 또한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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