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필자에게는 전국의 지역지를 포함해 각류의 신문이 10여 개 배달되지만, 솔직컨대 신문은 아예 읽지 않는다. 자신이 건방져서인지 모른다. 더구나 고향측 신문은 한 곳에서도 배달되지 않는다. 구독자 명단에도 없을 것이다. 우편함에 포만감을 주는 게 미안할 때도 있다. 반면에 본지에 글 쓴다는 것도 시간이 없을뿐더러 발행인으로부터 '기고금지'를 은근히 바라는 나로서는 가끔은 팬들을 위해 시류에 관해 주고받은 촌평을 옮길 때가 있다.
 TV나 신문에 대해 시청하거나 안 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시류를 읽고 지역지와 지방지를 넘어 전국을 망라한 신문에 기고하고 방송에도 가끔 멘트를 날리며, 종편TV에서 출연 제의를 받은 적도 있지만 나서지 않는 아웃사이더이다. 이에 종사하는 이들로부터 시류에 대한 조언을 구해오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내겐 고향측은 물론 전국적인 취재원이 있다. 덩달아 언청난 제보도 있지만 웬만한 건 넘어간다는 점을 간파했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읽은 글에서 "논설이 뭐니, 칼럼이 뭐니, 수필이 뭐니" 의 무지막지한 논조가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마디로 논쟁의 가치는 물론 비평할 자격조차 없는 아류 주제이기에 유식한 용어를 차용하면 '정구죽천이면서 인간적이지 않게' 너무나 건방지다. 정치사회 등 문학에 대한 비평가의 자격자로서 보건데도 논설인지, 칼럼인지 아니면 소왕국 꼴뚜기 놀이패의 잡문인지 헷갈린다.
 소싯적 짧은 기간이나마 기자생활을 거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논사설을 썼고, 둔재인 터라 2전 3기만에 에세이트란 일종의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이를 넘어서도 신문문예에만 5년간 낙선하다가 가까스로 시인이란 라이센스에 이어 문학평론가에 동극하고 최고학위과정에서 세부적으로 비평론을 탐구한 바이다.
 이에 내 프로필에는 이를 총칭하여 '대한민국 문사'. '시사평론가', '민초대변인'이라고 적는다. 더 나아가 인물백과사전에는 필자에 대해 크게 '작가', '언론인', '평론가(비평가)', '정치인'으로 분류해 놓은 줄로 알고 있다. 여기서 문(文)에 대해서만 네댓 가지 호칭이 붙어 다니니 초면인 자는 헷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봐도 필자는 전문칼럼니스트를 떠나서도 비판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이로써 진짜 글을 쓴다는 이는 비비평가 주제에 '비평가의 비평'에 비평하는 무례는 저지르지 않는다. 이들 또한 비평가로부터 유탄을 피하려 한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에게 탓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문학적 비평이나 시류에 의한 평 외는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법을 떠나 글에서도 공격과 방어가 있다. 그런데도 공격만 있을 뿐, 방어가 안 된 잡설류(雜說類)는 비평가에게 밥으로 돌아올 수 있음이다.
 감히 다시 말하건대 필자야말로 문학계와 언론계에서 인정한 평론가(비평가)로서 작품에 대한 비평할 자격이 있겠다. 저널리스트로서나 시사평론가로서 한마디 하고자 하면 엷은 곡학아세로 누구든 자신의 위치가 '정치적 중립군'임을 망각하고, 지방정치권에 기웃거리며 소왕국 예정 폐하(?)에게 줄서는 작태는 자살골이다.
 같은 격에 두기는 '너무나 아닌 당신' 격은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해롭다. 중원의 개구리는 전국으로 회귀할 수 있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중원에 나오지도 못할 뿐더러 나오기가 힘든 법이니 주제 파악을 하고 겸손이 미덕임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군상들을 지방정치모리배들 누가 이용하는지 관전하는 재미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자중하는 게 유탄을 안 맞는 법이다.
 지식자랑은 없다. 설사 그것도 나설 자리가 있기에 멍석이 깔아지면 천박지려한 필자일 수 있으나 멋지게 할 수도 있겠다. 자, 그러면 여기까지 논한 게 전국의 소왕국에서 자기만의 논설을 쓴다는 감투들이 보는 신변잡기라 평하는 수필인지, 더구나 아래 논조는 이번 주 본지와 다음 주 중앙일간지 청탁 원고로 나가는데 독자제현도 잡글 또는 아니면 무슨 류인지 본 비평가의 글을 보자.

 
 '표절공화국'에서도 작가만은 순수해야

 표절(剽竊; plagiarism)이란 '지식재산권 절도'는 끝내 죽음이다. 고로 '문학계의 황후' 신경숙 소설가는 죽었다. 부패공화국의 오명에도 일조하는 모럴 헤저드가 문학계에도 판친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배부른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이 표절하였음을 분명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독자를 우롱함과 문학계 약자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안긴 사건이다. 미시아 유기오 작품 중 어느 작품은 읽었으나 표절시비의 닻을 올린 <우국>만은 안 읽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비겁하면서도 도도했던 소설가 신경숙과 출판사 창비는 늦게나마 표절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듯하다. 그러나 유체이탈화법에 의한 사과인지라 화끈한 맛도 없다. 문학권력에 편승해 영혼조차 상실한 막장드라마의 씁쓸한 기운은 가시지 않는다. 반면 맑은 영혼으로 부대끼는 작가는 초라함을 넘어 배가 고프다. 심지어는 그 힘겨움에 여명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생을 마감하는 작가까지 발생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한국의 대표작가란 그 이면에는 거대 출판사의 작품 기고 의뢰에 의한 악어와 악어새 관계였다. 생활고에 힘없어 허우적거리는 올곧은 문학인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겼다. 이러한 점 등을 들어 5년 전, 필자는 언론과 문학지를 통해 "한 세대가 흘러도 대한민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할 것이다" 고 단언했었다. 그 단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소설이나 시 등 문학작품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에서의 창작이어야 한다. 그러나 표절의 유전자를 키우고도 명쾌한 자정노력은커녕 검찰의 손에 넘어간 현실이 안타깝다. 그것도 작가를 넘어 비평가(문학평론가)가 아닌 사회학자의 손에 의해서다. 이 부문만 해도 자존심을 구긴 '문학계의 굴욕'이다. 형사상 범죄성립 여부는 불투명해 보이지만, 이제 소설가 신경숙 그녀는 문단권력의 엄호 속에서 벗어나 자숙을 넘어 절필도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문단권력과 패거리들의 전횡에 많이도 맞섰다. 심지어는 그 비판에 거대 문학인협회 수장으로부터 페이스 북 친구까지 절교당하는 사태로 갔음은 물론, 시인 같지 않은 시인들로부터 비평을 거부당하며 떼거리로 반항하는 그들에 대해 끝내 법의 잣대를 들이댄 적도 있다. 이로써 시 부문은 스스로 절필까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양대 문학인협회의 패거리문화와 문학의 권력화, 더 나아가 상업화에 대해 돌직구를 날리면서 견제해야 할 비평가들이 침묵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권력에 포섭된 채 출중한 동업관계였음에도 이제야 동면에서 깨어나는 개구리나 구원투수인 양 날뛰는 민낯이 부끄러워 화끈거린다.
 시어 한 줄에도 표절이 속출하는 현실에도 침묵하는 건 비평가로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비평 없는 문학을 하겠다는 발전 없는 작가들의 발상 또한 이번 기회에 없애야 한다. 거대 출판사도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며, 비평가 또한 푼돈에 매료된 '문학권력의 시녀'가 돼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으며, 침묵의 카르텔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비평에서의 침묵은 암흑세계를 잉태함이자 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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