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사실에 근거하여 옳은 것을 찾아낸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또는 실학은 이론이 아닌 실천(행동)만을 학문으로 친다. 어느 학문이고 실행을 강조하지만 실학에 있어서는 이론만으로는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학 자체의 계보는 송(宋) 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고려 말의 야은 길재(吉再)에서 시작하여 김종직, 조식, 조광조, 이이(율곡)등으로 이어지면서 이들 모두가 실행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에서 실학파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조선 조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고 말이 아니게 나라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오로지 고통 받는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에만 평생을 바친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육이 늘 입에 달고 외친 구호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하늘, 외적, 백성 세 가지이다. 그 중에서 제일 가까운 데 있는 백성을 안정시킨다면 멀리 있는 다른 두 가지 두려움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백성들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가운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에 더 한층 견디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특히 공물(貢物)이라는 현물세인데 빈부에 차별 없이 수시로 과다하게 책정되어 백성들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나온 대책이 토지 소유를 기본으로 하여 쌀과 무명으로 납부케 한다는 대동법이다. 그 외에도 우리 농사에 적합한 역법(曆法)을 만들고 수차(水車)를 이용한 농사 개량법을 내놓았으며, 인쇄술을 발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 것 등을 그의 실학적 공로로 돌려야 할 일이다.

 평생을 재야에만 묻혀 살면서도 나라 걱정을 하며 수많은 사회개혁안을 내놓은 학자가 있으니‘ 임금이 없어도 백성을 살아갈 수 있지만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의 은혜가 임금의 그것보다 더 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 임금만을 위하여 억조의 힘을 낭비하고 물자를 부족하게 만들어 은혜가 고루 돌아가지 않게 하는가 ?’ 라고 갈파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그 대표적 학자이다. 왕조시대 사람으로서, 그것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정말 파격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정치구조를 간소화하고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쳐야 하고 과거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관청의 기구 또한 전면적으로 개편 축소하면서
관리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환관과 궁녀의 수를 줄이고 임금부터 절약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토지는 가구당 최소한으로 필요한 토지기준을 정해 그 이하의 토지는 매매를 금하도록 하여 부의 집중을 막고 가난한 백성들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세를 경감하고 세법을 개혁하면서 노비의 수를 줄이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포함된다‘. 조선에는 일하지 않고 사는 무리가 지나치게 많다. 벼슬이나 학식이 없는 자라도 양반이라 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일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고치기위해서는 농사를 짓는 양반을 멸시하고 교류도 하지 않으려하는 의식부터 없애야 한다. 따라서 관직을 엄격히 제한하고 노비제도를 고쳐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농업 생산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바른 외침은 지금도 새겨들을만한 일 같다‘. 백성들의 자력경쟁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생산에만 몰두케하고 나라에서는 도적을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아 벽지의 미개간지도 안심하고 개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사치를 즐기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사치를 방치하면 아무리 힘써 생산을 해도 소용이 없다. 또 지금 사용하는 화폐는 사치를 조장할 뿐이며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풍습을 해친다. 지금 청국으로부터 진기한 물건과 호사스러운 비단을 사들이는 사치가 성행하니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그리고 상업에 눈이 멀면 농민은 농기구와 토지를 버리고 장사꾼으로 나서려 할 터이니 이것은 반드시 억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속에는 시대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지금과는 맞지 않는 대목도 있으나 그 정신만은 여전히 늘어지고 흐트러진 우리들의 모습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까마귀는 검다’라는 경직화 되고 고착화 된 생각을 매우 싫어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실학자로서의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지론으로‘ 까마귀 날개보다 더 검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빛에 비추어 보면 엷은 황색도 돌고 비취색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매사에서 정해진 일정한 빛깔이 없는데 사람이 먼저 눈과 마음으로 정해버리고 만다’ 면서 주관적 독단주의를 그는 싫어했다.
 이익과 이가환을 계승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인간 수양을 강조하는 퇴계의 이론을 따르면서도 능동적 실천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율곡의 주장도 수용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당시만 해도 당파 논리에 따라 자신들의 이론적 기반과 반대되는 주장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던 당시의 경직된 사고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그는 명말 청초의 실증적인 학풍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세계화’를 강조했다. 영. 정조의 통치 아래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개혁 의지가 정조 사망 이후에 완전히 차단되고 무위로 끝나버린 역사적 불행은 사회적 관념이 아직 성리학적 관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개혁 세력을 집단화하여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제도개혁을 등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의 구조가 바뀌었으므로 통치기구와 이념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겨서 민생의 근간이 무너져 조세 기반의 약화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청렴(淸廉)이란 목자(牧子)의 본분이오, 만 가지 선행의 원천이다’라고 외친 온건파적 선각자의 목소리가 오늘의 혼탁한 세상에 더욱 청아한 목소리로 메아리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주로 서화(書畵)의 명인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연암 박지원의 학풍을 계승한 실학자로서의 역할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금석(金石)을 자료로 삼아 역사를 연구하는 금석학에 그 본질이 있다고 믿은 데서, 북한산의 진흥왕 정계비의 비문 판독 등을 비롯한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놓았다. 그는 이 금석학을 기반으로 전서나 예서에 통달한 후 그만의 독특한 서법을 창안해 내었다.
 글씨란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한 뜻이 없으면 쓸 수 없다는 지론 하에, 글씨 쓰는 사람의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가 없으면 손끝에 청고 청아한 뜻이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했다. 글씨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격이 드러나는 자기수양의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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