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일부 지역지 등 언론에 내에 대한 선거관련 보도가 나간 모양이다. 고향에서 태어나 한 세대의 세월을 보낸 내게 몇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굴뚝에 땔감은 태웠기에 연기가 나는 게 아닐까.
 세상의 빈자리는 후세나 새로운 주인이 맞는 법이며 빙글빙글 도는 의자의 임자는 따로 없다. 허나, 내가 여태껏 추구한 떡이 맛이 있을지, 아니면 바보들이 군침을 흘리는 떡이 맛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안긴다. 이 신문이 발행되는 날이면 내 육중한 체구가 고향의 골방에 처박히겠다. 작금의 행보에 대한 심정을 이와 같이 피력하고는 금주의 테마에 들어간다.

 간혹 연배가 든 일부 선배나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이, 시기와 짙투란 정신병으로 자신의 생에 있어 여명을 채우지 못할 이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비판하느냐" 의 조의 시비를 거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에는 내게 직접적인 비난이나 비판을 가한 적도 없고 가할 수도 없다. 설사, 상대에게 배추장수라고 폄하하거나 탓하지 않듯이, 이건 엄연한 내 직업의 한 단면인데 탓함은 무례다. 또한 내 입을 틀어막으려는 세력에겐 비겁하게 굴복하지 아니하고 목숨 걸고 맞선다.

 어느 선배에게 주변에서 "정종암은 왜 비판만 하냐?" 에 "그 애가 그러면 평론(이하 '비평'과 혼용)가로서의 본분인데 어떠냐?" 고 답했다는 것이다. 맞다. 비평가인 내마저 비판 않는다면 스스로 책무를 유기하란 말이냐. 평론가가 비난이 아닌 비판이나 비평을 않고 무엇을 할꼬?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론가가 말이다.
"아름다운 꽃이 피웠습니다." ,"그대의 사랑도, 인생도 아름다워라"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등 콧노래에 어천가를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냐. 내 능력유무를 떠나 이 정권, 저 정권에 빌붙어 사욕을 취하거나 졸부에게 넙죽넙죽 술을 얻어 마시는 삶도 아니며 부정의에 고개 숙이는 삶도 아니거늘,,,

 누가 인정을 하던, 않던 대한민국 평론가임은 뛰어넘을 수 없다. 물론 별개의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전업은 아니다. 내가 평론가 타이틀을 가지고 싶다고 되는 거거나 된 게 아니다. 문학계에서는 내게 부여된 두 타이틀을 제외하고도 문학에 대한 평론을 하는 문학평론가로, 언론 등에서는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의견을 개진하는 시사평론가란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전자에 대해서는 라이센스 취득을 넘어 학위과정에서 세부적인 연구를 했으며 평생 공부해야 하는 분야로 아직도 어렵다. 후자에 대해서는 수백~수천 편의 평론을 쏟아냈다.
 이러한 나머지 통칭하여 평론가로 칭해지며, 지인들은 약칭하여 '정 평(정 평론가)' 또는 '정 칼(정 칼럼니스트)'로 부르기도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정치평론가로 칭하기도 하지만, 단편적 지식으로 갈등을 부추기는 종편 쓰레기들이 싫어 개인적으로 거부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된 내 어느 저서에 대해서도'정치평론집'으로 분류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나 외국인간 교유에 있어 '대한민국 평론가'로 일컬어진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평론가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공부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분야이기에 설사 내가 소인배나 불학무식한 이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일부 허접데기 작가들처럼 요란스럽지 않고 묵묵히 노력할 뿐이다. 나는 어떤 개인을 비난은커녕 비판해 본 적은 없다. 더구나 소인배처럼 상대를 흠집 내거나 비난은 않는다는 거다.
 그건 비평이 아니다. 단체나 국가기관, 그리고 정부 등 시류에 따른 비판이다. 그리고 올바르게 나아갈 방향도 제시한다. 비판 없는 세상, 평론가가 없는 세상은 암흑이요. 신독재가 아닐까?

​ 이 땅의 평론가는 민초들에게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데 일조하고, 민초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자(使者)가 아닐까? 어느 누구 개인을 지칭하는 게 없다. 이게 평론이다. 고래로 평론가는 상황에 따라서는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 보자. 아래는 이번 주 SNS에 내뱉었던 비평이다.

 
 여태껏 살면서 반대진영이나 상대방에게 '좌빨' , '빨갱이'란 표현을 써본 적이 없다. 단지, 북녘 공산주의자들에겐 후자를 간혹 썼을 뿐이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두고도 이러한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깝다.
 좌파와 우파는 당연히 존재하는 거며, 각 진영마다 장단점이 있다. 이러한데도 국민 간 분열을 획책하는 극좌나 보수꼴통들은 독도와 대마도 의용수비대로 나서면 어떨까. 이러함에는 당연히 무급이다. 허구헌날, 배부른 돼지새끼들이니까.

 메르스 사태로 각종 모임 등 행사가 취소되고 장사가 안 된다는 볼멘소리다. 이러한 때, 한 친구는 많은 이들이 모이는 행사에 짧은 축사를 내게 부탁한다. 선결조건은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행사장에 입장해 달라는 거다.
 이러한 제의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어느 결혼식에서도 전체 하객에게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진행한다는 전갈이다. 개개인의 슬픈 인생보다 더 슬픈 게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이러하듯이 국민인 게 쪽팔린다. 메르스 하나에 허겁지겁했어야 되겠냐. 지난 주 토요일 오후, 선배의 생신도 축하할 겸 만나 대취했으나, 2차를 가자는 제의에 단란주점으로 옮겼다. 양주 한 잔을 마시려는 찰나에 마스크를 쓴 이가 들어섰다. 이에 불안한 나머지 술값을 계산하고는 피아니스트가 있는 단골주점으로 옮기니 문이 닫혀 있었다. 셀러폰으로 주인장을 호출하니 메르스로 인해 손님이 급감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갈 수가 없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있어 정부와 지자체간, 여야 간의 완력이 있어야 되겠냐는 것이다. 내각, 그리고 슈퍼 갑질인 여의도판 정치꾼 그대들이 한심할 뿐이다. 사계절이 있는 대한민국의 봄은 완연하다. 그런데도 작년 봄에는 세월호 사태, 금년 늦은 봄에는 메르스 때문에 개인적 행사까지 취소되니 스케줄에 착오가 생긴다.

 정부는 왜 욕을 먹냐? 욕한다고 혹여 국민을 겁박할 사안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사태 발생을 욕하는 게 아니다. 사후대책을 발 빠르게 대처 못하는 데 있단 점이다, 다시 말해 콘트롤 타워인지 뭔지를 작동을 잘 못하기에 국민들은 질책하는 거다.
 국민들은 국가를, 정부를 믿는 게 아냐. 허나, 이제 무얼 믿고 따르겠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업하다가 국세가 좀 밀리면 악다구니 쓰며 사채업자에 버금가게 고율의 이자까지 물리는 대한민국아, 누가 주인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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