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내 홈페이지에서 옮겨 적는다. 그기에는 오탈자가 많다. 워낙 즉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레도, 이게 세상사는 사람의 맛과 멋이 아닐까 싶다. 그럼 각설한다.

 2015.5.28
*1)나는 오늘밤이 두렵다. 술 마시기가 진짜 싫으니까. 두 군데 다다. 자정께 초청까지 합치면 세 군데다. 딱, 서울을 떠나고 싶다.

 2)이제 출판사를 섭외해야겠는데, 인세로는 타산이 안 맞다. 자비로 해야만 남는 장산데, 초도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진퇴양난이다. 출판기념회는 뒷전으로 하더라도....그러잖아도 연봉 6억짜리 대학동창이 동창회비 몇 십만 원을 안 냈다나?
"백산(23년 째 내 아호이자 필명)은 그 책을 몇 권 팔아서 벌써 냈노!"
"어~봐! 허리 휘청했다."
"그래, XX 문사는 그 돈이면 5백만 원어치라 5만 원 정도만 내도되는데..." 라는 동정이다. 이번 출판에는 큰 봉투 하나 주려나! 군상들은 꼴에 옛 부터 문사는 배고픈 직업이란 소리는 들었는지, 이구동성으로 "글 쓰면 배 고프제?" 하면서도 각종 회비 감액해 주는 모임은 여태껏 없었다. 조롱을 말던지... 되레 내가 임무 완수는 빠르다.

 3)늙은 놈(?) 겸임교수 채용도 연구실적 논문 400% 요구냐? 그냥 이대로 반백수로 글이나 써 원고료로, 그리고 강연료나 받아 먹고 살자. 어차피 봄날은 갔으니.....


  2015.5.26
 *1)어젯밤 다섯이서 술을 마신 결과 둘은 소위 필름이 끊겼다. 내만이 덜 취한 줄 알고 점심때가 되니 기억을 되새기는 전화가 빗발친다. 나도 조금 취한 터라 귀가 길에 아줌마들의 호객행위에 불필요한 인심성 쇼핑까지 했었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지만, 뜻이 맞은 이와 마시면 주거니 받거니 밤새껏 마셔도 괜찮다. 끝내 내가 먼저 뻗어본 적은 없다.
적당하게 마시고 발동(?)을 걸지 않으려 하지만, 걸렸다하면 장시간을 버텨낸다.암만 비싼 술에 절세미인이 반주를 맞춰도 불편한 자리는 안 간다. 그러한 술은 안 마신다. 그건 고역이다. 내는 자는 대접을 받은 자나 부담이 없이 선술집에 앉아 소주를 곁들이는 대화의 장이 낫다. 어제 맞은 내 생일을 축하하려 나온 지인들이었다.

 *2)종로3가역 3번 출구 숯불꼼장어집에서 2차 중. 마음 맞은 군상들과 함께 하니 맛이 좋다. 그에다 내 사인까지 받은 집이다. 가끔은 매체에서 나를 알아보고는 산이나 행사장, 그리고 유흥음식점에서 사인공세를 받을 때가 있다. 부담 없는 가격에 마실 수 있고, 요즘 같은 날이면 골초들 담배 피우기도 좋고. 산행을 줄기는 주인장 대박 나시라.

 *3)"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지하가 70년대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오적필화 사건 등에 연루돼 옥살이를 한 것과 관련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배호근 부장판사)는 김씨와 그의 부인, 장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김씨와 가족들에게 국가가 15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단다." 보도에 대해 SNS에서 김상수는 이렇게 비평했다.

김지하는 억울함을 부분으로나마 돈으로 배상받았는데, 정작 김지하는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군 사망정국 때인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당시 군부 쿠데타 2인자 노태우 정권에 반대한 젊은이들을 향해 '시체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 등 비난을 퍼부어, 김지하로 인하여 졸지에 '빨갱이'로 내몰린 당시 젊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무엇으로 어떻게 푸나? 그리고 툭하면 백낙청 등의 지식인들을 깡통 빨갱이로 이념 도구화한 처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또 김지하가 비난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고통은? 지식인으로의 김지하의 사회교란과 사회분열은 그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말이다.
이에 대해 나는 "곧게 늙자. 내 몸꼴이 내일 죽어 당장 흙이 될 지라도...,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면서 추하게 늙지 않으리라고 이 양반 보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고 덧붙였다. 사실컨대, 이 양반에 대해 문학비평을 하려다가 구역질이 엄습해 중단한 바가 있다.

 
 2015.5.25
 *1)그저께가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이었다. 추도사는 유족의 고유권한임에도 말이 많다. 40세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나이다. 애국돌이 변씨와 노통의 아들이 40대 초반인데, 이들의 이념과 철학을 떠나 어리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기야 일흔이 넘어도 권력을 쥔 꼰대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어리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애 꼰대짓 하는 이들 즉, 40~50대 측면에서 이들을 애 취급하는 건 글쎄다. 여야가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게 꼴사납다. 그때(재임 시)는 몰랐으나 지나고 보니 참 좋은 대통령이었음에 개인적으로 미안한감을 금할 수 없다. 아마도 노통은 새로운 각도에서 후한 평가가 지속되리라고 여겨진다.

 *2)삼각산 아래 길상사 그늘아래 벤취에 앉아 공양주 길상화(자야)와 무소유 법정 스님의 흙으로 돌아 왔음에 인생무상을 느끼며 즉석에서 이렇게 시답지 않은 시를 읊었다. 탐욕에 찬 부패공화국 수도의 거리를 걷고 싶지 않은 욕심에 찬불가에 심취한 시간을 보내다.

 삶/ 백산(栢山)

나도 왔다가 갈 곳
그대도 갈 그 곳
무언의 세계, 어데일까.
새삼, 삶이란 의미를 되새기니
내 삶도 중천에서 기우는구나.

여기, 천 억대 재산을 기부한 길상화도
무소유를 지향한 법정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 왔구나.
내, 그 흙을 밟는다
어느 날, 어느 날
내 육신도 한 줌의 흙이 되리다.

그 흙을 내 후대들도 밟으리다
내 자리가, 그대의 자리가
어데 영원할 게 있던가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곳을 벗어나면 탐욕의 군상들이 날뛴다. 하이에나처럼...

아, 내 여기 머무는데도
잠깐의 틈을 주지 않고 정적을 깨뜨려도
하산을 주저하는 이 순간이 유토피아로구나.

 *3)성북동 길상사에 왔다.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에서야 방문하게 되었다. 감회가 새롭다. 백석 시인의 애인 자야(본명, 김영한)가 운영하던 요정을 법정 스님께 기증한 게 이 절이다. 서울 성북동 부자 동네다. 자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게 한다. 백석 시인에 대해 논문 한 편을 썼으나 처음으로 왔다. 와 보지 않고도 길상사, 모던보이 백석, 자야, 그리고 문학관에 대해 절묘하게 묘사했었다. 여기서 밥 두 그릇 먹고 시인과 어린 시절 따라 다녔던 내 어머니 생각에 젖는다.
 
 *4)경기 부천에서 세 자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함에, 흥청망청 혈세 쓰며 궁민 간 분열 위에 피를 빨아 생존하는 국개원 할매, 할배 당신들이 죽어야 이러한 사태가 발생 않을까? 그러잖아도 인구가 모자라는 대한민국이다. 젊음이 죽고 있다. 최소한 삶마저 유지해 주지 못해 되겠냐? 오늘도 그 배지(뱃지)를 지키려고 불교 행사에 얼굴 내밀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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