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리본에는“아이들을 살려내라! 살아서 돌아오라! 얘들아 돌아오너라!  하늘에서는 행복하게 지내길 빈다! 구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곳에서 편히 쉬어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표현에서 결국에는 절망적인 표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지난달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아직도 10여 명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0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실종자, 희생자 가족들이 바다를 향해 실종된 가족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얘들아 돌아오너라!”애들아 돌아오너라!“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건은 2014년 4월15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교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일부승객 등 470여명이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라남도 진도의 팽목항에는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노란색 리본이 매달리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노란색 리본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노란색 리본에는“아이들을 살려내라. 살아서 돌아오라“ 하늘에서는 행복하게 지내길 빈다. 구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곳에서 편히 쉬어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표현에서 결국에는 절망적인 표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우리국민이면 모두가 한사람이라도 살아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으나 결국에는 주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 탑승자의 생존은 희미해졌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뒤집어진 세월호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도 구명조끼를 입은 체 죽어간 어린 학생들의 참상은 온 국민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바다 속으로 뒤집어져 가라앉는 모습을 TV로 바라보면서 생존자를 한시바삐 구조할 것을 온 국민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단 한사람도 살아오지 못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서글펐다. 많은 국민들과 피해 가족들은 한사람이라도 살아서 돌아오라고 염원을 담은 노란색 메시지의 꽃과 노란색 종이배를 팽목항 앞바다에 띄우기도 하였으며 염원을 담은 노란색 리본이 방파제 전체를 뒤덮었고 리본에는 눈물겨운 추모 글들이 세세히 적혀 있었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는 수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실종자 가족들은 자녀가 살아서 돌아오라고 팽목항 바닷가에서 목이 쉬도록 자녀의 이름을 불렀고 서러움의 목소리는 바다위로 퍼져나갔지만 자녀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들은 팽목항 방파제에서 세월호 실종자들이 살아서 돌아오라는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고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었으며 노란색 리본은 마치 연등처럼 팽목항을 뒤덮었다. 여기서 잠깐 세월호 침몰의 순간을 시간대별로 정리해보자.

 2014년 4월15일 오후 9시 세월호 승무원,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과 교사 320여명과 승객 등 470여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해 인천항을 출발하지만 안개주의보로 2시간 30여분 늦게 출발한다. 다음날 4월16일 오전 8시 52분 단원고 2학년 최덕하 군(사망)이 전남 소방본부 상황실에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고 첫 신고를 한다. 이어 오전 9시 30분 목포 해양경찰 경비정 123함이 침몰 현장에 도착한다. 오전 10시 17분 단원고 학생이 마지막 카카오톡 구조메시지를 발신한다.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오전 11시 18분 학생들의 구조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는 선수(앞부분)만 남겨두고 침몰하기 시작한다. 오전 11시 20분 경기도 교육청 대책반에서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잘못된 내용을 발표한다. 오전 11시 35분 여자승무원인 박지영씨의 시신이 발견된다. 4월17일 중앙재난 안전 대책본부가 0시 현재 사망자가 6명이라고 발표한다. 오후 4시 20분 박근혜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체육관을 방문한다.
 4월18일 오전 11시 50분 선수(배의 앞부분)부분까지 물에 잠겨 완전 침몰한다. 오후 3시 38분 민.관 .군 합동구조팀 선체 2층 화물칸 문 열고 선체에 첫 진입 시도한다. 오후 4시 단원고 교감 진도체육관 인근 야산에서 숨진 체 발견된다. ‘모든 책임지고 갑니다.’란 유서를 남긴다. 4월19일 오전 2시 이준석 선장등 승무원 3명을 구속한다. 오전 11시 40분 사망자 50명으로 늘어난다. 오후 11시 50분 구조팀이 객실진입에 성공한다. 단원고 학생 시신 3구를 건진다. 4월20일 오전 9시 실종자 가족들 진도 대교서 총리 면담을 요청하며 연좌농성을 벌인다. 실종자 가족들은 ‘청와대로 가겠다.’며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4월22일 오전 9시 사망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4월23일 오후 6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끝까지 실종자를 구조한 뒤에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한다. 4월27일 오전 10시 정홍원 국무총리 참사 책임지고 사의를 표명한다. 4월29일 오후 사망자가 200명이 넘어섰다고 발표한다. 5월1일 오전 3시 20분 다이빙 벨 투입 논란 후 철수 한다. 이종인 알파 잠수기술공사 대표가 다이빙 벨 투입이 실패했다고 발표한다. 5월2일 오전 6시 30분 침몰지점 남동쪽 2km지점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사고현장을 다시 방문하여 실종자 가족들과 비공개로 면담한다. 5월15일 이준석 선장 등 주요승무원 1명을 기소하였다.5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청년들이 촛불과 노란 종이를 들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세월호 침몰사고 32일째인 17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 노란 리본이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끼고 있으며 실종자 가족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 32일째인 5월17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앞바다에 이날 전남 강진에서 방문한 주민들이 조기 수색과 희생자 애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란종이배와 노란 꽃을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이 방파제에 학생들의 신발을 놓아두고 살아 돌아오기를 빌었다. 수정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참교육 사수 전국 교사대회를 개최하였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2일째,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3만여명의 시민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였고 33일째인 5월18일 오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과자, 음료, 노란리본이 펄럭였다. 5월19일 세월호 침몰사고 34일째인 5월19일 오전  박 대통령은 이날 초동단계부터 구조업무에 실패한 해양경찰청을 전격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노란색 리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노란 손수건의 이야기부터 그 근원이 시작된다. 그럼 여기서 노란손수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미국 뉴욕 의 버스 정류장은 매우 붐볐다. 생기발랄한 젊은 남녀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플로리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다. 그들은 여행의 기분에 취해 떠들고 웃다가 문득 그들 앞자리에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곳에 시선이 모였다. 주위의 관심은 높아졌고 결국 사내는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빙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교도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나는 부끄러운 죄를 짓고 오랜 시간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만약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혼자 사는 것이 고생이 된다고 생각되거든 나를 잊어 달라고 했소. 재혼해도 좋다고 했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했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석방을 앞두고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썼소. 우리가 살던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 달라고 말했소. 만일 아내가 재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노란 손수건을 달아 놓지 않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 버릴 거요.”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일행들도 이제 잠시 뒤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 궁금해 하며 가슴을 조이게 되었다.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버스 안은 설레임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을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승객들은 모두들 창가로 몰려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드디어 버스가 마을을 향해 산모퉁이를 돌았다. 바로 그때. “와~!!” 젊은이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버스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뒤덮여 있었다. 20개, 30개 아니 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물결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편이 손수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참나무를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었다. 이윽고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늙은 전과자는 승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버스 앞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나 집으로 갑니다." 노란 손수건은 희망이요. 꿈이었으며 믿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세월호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노란색 리본은 노란손수건이 아니었다.

 *필자 남 덕 현은 1949년 고성읍 동외리 정동(솟골)에서 출생하여 고성 초. 중학교 및 통영고와 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초등학교장으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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