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언젠가 태국 여행길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빗물이 차오르자 차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버스 안에 있던 한 미국인 청년이 신사복을 입은 채 차 밑으로 누워서 기어들어가더니 온 몸이 흙탕물과 기름 범벅이 된 채 기어이 차를 고쳐 무사히 목적지에 갈 수 있었던 일이 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몇 만원 밖에 못 받는 더럽고 위험한 날품팔이를 할 때, 혹시라도 남의 얼굴이 쳐다보이거나 ‘자존심 상하게’ 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존심’이란 말 자체를 잘 못 쓰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강원도 철원의 비무장 지대인 지피(Guard Post =GP 哨所)에서 북한의 전방 기지인 오성산을 마주 보고 왼 편에 백마고지를 마주보는 지점에서 매일 인민군들과 마주보고 때로는 마주치기도 하면서 군(軍) 생활을 한 일이 있다. 1964년이니 한국전쟁이 종식된 지 10년 정도라 곳곳에 참전 용사들의 옷가지, 철모, 소총, 박격포, 탄알, 수류탄 등이 눈에 들어올 때 마다 선배들이 피 흘려 싸우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루해를 넘기는 하루하루이기도 했다. 늘 실탄이 장전된 상태로 손가락으로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갈 수 있게 준비 된 상황 하에서 캄캄한 밤중에 혹 산짐승이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 서는 늦출 수 없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24시간 내내 귀가 따가운 북한의 대남방송도 참아내야 했다. 방송의 내용이란 한국군 병사들에게 무기를 가지고 분계선을 넘어 오라는 것과, 미군들에게 성 추행 당하고 있는 너희 누나와 여동생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또는 미군정 하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남한 백성들의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줄을 잇고 있다는 등등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일 먼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와 있는 이 순간이 내 생애 최고의 자랑이자 보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자존심이 무슨 의미인지를 돌아보려면 1.982년의 포클랜드(Falkland) 전쟁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에 군정(軍政)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던 아르헨티나는 복잡한 내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포클랜드 섬을 일시 점령하였으나 수만리 밖에 있는 영국이 신속하게 전면전을 선포하면서 파병하자 싱겁게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열성적으로 영국을 도왔고 이웃나라 칠레가 영국을 도운 것도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 후 갈티메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실각하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은 징병제인데 비해 영국은 희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병제이니 전투에 임하는 동기와 자세부터 달랐다. 또 무엇보다 영국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왕족인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를 몰고 직접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 결정적인 전투의 향방을 결정해 주는 요소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위험하고 더럽고 어려운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이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한다는 사고와는 판이하게 다른 참 ‘자존심’을 앤드루 왕자가 보여 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외래어인 프라이드(pride)란 pri(in front of 앞) 와 de(be=exist 존재하다) 의 합성어이니 위험하고 더럽고 어려운 일에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나선다는 뜻이다. 중동 전쟁이 났을 때 미국에 있던 아랍 유학생들과 이스라엘 유학생들 모두 같이 보따리를 쌌는데 아랍 학생들은 혹시라도 징병을 위한 소환이 무서워 피신하기 위해서이고 이스라엘 학생들은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서 였으니 전쟁 시작도 전에 결과가 빤한 일이었던 것이다.

 고대 단군조선 시절에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중원에 은(殷)나라를 세웠는데 당연히 시조 성탕(成湯) 자신이 우리 동이족이다. 탕왕이 하 왕조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되어 큰 가뭄이 들었다. 기우제를 지냈건만 여전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자 사관이 말하였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만 비가 내릴 것 같사옵니다’. 왕이 대답한다. ‘뭐야 ? 그리 해서는 안 된다. 비를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은 백성들을 위해서다. 만일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 나를 그 제물로 삼으라.’ 이리하여 성대한 기우제를 지내는 날이 되자 성탕은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헤쳤으며, 몸에는 불에 잘 타는 흰 띠 풀을 묶은 채 눈처럼 희 수레 위에 올랐다. 흰 말이 끄는 수레는 은(殷) 민족의 사당이 있는 상림(桑林)으로 향했다. 세 발 달린 솥(鼎)을 짊어지고 깃발을 든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앞장서서 걸었고 탕왕이 탄 수레는 그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무당(巫師)들이 목청을 돋우어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축도문(祝禱文을 낭송하며 상림(桑林)으로 향했다. 신단 앞에는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화로에는 번화(燔火)가 붉게 타오르는 가운데 무당(巫師)들 서너 명이 신단 앞에서 비를 내려 달라고 제를 올리고 있었다. 탕왕이 신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건하게 신에게 기도했다. ‘제게 죄가 있다면 그 죄로 인하여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마시고, 백성들에게 죄가 있다면 제가 그 죄를 받겠나이다.’ 제사장이 다가와 소매 속에서 가위를 꺼내어 탕왕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서 신단 옆 화로 속에 넣었다. 탕왕은 엄숙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장작더미 위에 서서 무당들이 장작더미의 사방에 불을 붙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이글거리는 태양이 걸려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신호 나팔소리가 울리고 무당들은 시단 옆에 놓여있는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횃불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는 높이 쌓여있는 장작더미 둘레를 몇 바퀴 돌며 노래를 부르고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 횃불을 장작더미에 던졌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듯 바싹 마른 장작더미를 핥으며 타올랐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장작더미 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서 있는 탕왕을 에워쌌다. 탕왕의 몸에 묶은 하얀 띠 풀에 금세라도 불이 붙을 긴박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탕왕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인지, 동북쪽에서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먹장구름을 몰고 와 삽시간에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더니 콩알만 한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 이어 번개와 천둥이 치더니 빗방울이 굵어지고 점점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쁨에 벅찬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장작더미 위에 서 있던 성탕도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온 세상의 구름이 몰려 온 듯 사방 천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시원스레 비가 내렸고, 7년 동안의 큰 가뭄이 일시에 해갈되었다. 장작더미에 붙었던 불과 신단 앞 화로에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일찌감치 꺼져 버렸고, 몇 줄기 파란 연기만이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환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경건하게 탕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환희에 찬 백성들의 찬가가 어우러진 가운데 무당들은 장작더미 위에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던 자애로운 군주를 부축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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