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1척을 더 합한 13척으로 330여 척에 이르는 대 선단을 맞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센 진도의 명량(鳴梁)에서 목숨을 하늘에 맡긴 불굴의 용기로 적선 30여 척 완파에 100척에 이르는 적선을 대파하면서도 조선의 피해는 거의 없는 믿기 어려운, 세계의 어느 해전사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울돌목(鳴梁)의 바다 밑 바닥에 쇠줄을 쳐서 왜선이 지날 때쯤을 기다려 그 쇠사슬을 높여 왜선의 움직임을 방해한 전략 또한 크게 주효했다. 무거운 쇠사슬을 감거나 풀면서 ‘강강수월래’ 란 노래가 생겨나기도 하였으니, 이는 ‘감감(쇠줄을 ’감‘고 또 ’감‘아) ’수월래(‘순라 巡邏’의 준말), 다시 말해 순라군이 순라를 돌 듯 쇠줄을 말뚝에다 감고 또 감자는 ‘영치기 영차’와 같은 노래인 것이다. ‘죽으려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불굴의 용기는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닌 하느님에게만 그 결정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전투에 나선 데서 임을 말해 준다. 임란 전 조선의 상황은 그간 한 번도 전쟁이 없어 대비책이 전혀 없었다. 적을 맞아 싸울 아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무기와 장비가 창고에 있는지 아무것도 파악조차 안 된 상태였다. 양반들은 군역을 면제 받았고 전쟁 경험이 있는 장수나 훈련 받은 군사라고는 물론 없었고, 백성들마저 나라가 빨리 망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닐 정도인 말이 아닌 상황 하에서 일궈 낸 승리였던 것이다.
‘주의 종(다윗)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이 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 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머리 위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의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 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 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없인 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行伍 = 隊伍)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려 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구약성경 중 이스라엘의 목동 다윗이 침략군 블레셋(팔레스타인)의 사나운 장수 골리앗을 맞아 전쟁에서 쓰는 창, 칼, 방패가 아닌 목동들의 일상 용품인 물맷돌로 죽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에서 시작 된 족장 시대에서 사사(Judges) 시대를 거친 다음 백성들의 열망에 따라 초대 왕권을 확립한 사울 왕 시대에 있었던 전쟁 이야기다. 사울왕의 눈에 조그만 목동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몸집 크고 용맹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으니, 마치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에게 발목이 잡혀 꼼짝 못하던 신라군이 반굴과 관창 두 화랑을 전투에 내보내어 땅에 떨어진 군의 사기라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던 가느다란 희망,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왕은 어린 목동에게 왕 자신이 사용하던 갑옷, 투구, 칼 등을 주며 싸우러 나가라고 격려했다. 모든 것이 다 인간 보편의 상식이자 어쩌면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수 있다. 몸집 크고 싸움에 단련 된 적장을 맞아 겁에 질린 사울 왕과는 달리, 목동 소년 다윗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기에 적장의 몸집이 크다는 것이 바로 물맷돌로 큰 표적을 맞히는 것이니 더욱 쉬운 표적이라는 확실한 자신감에서 온 것이다. 그 자신감은 또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산 위에서 혼자 양을 돌보면서 사자와 곰 등 사나운 맹수들을 맞이하면서 늘 하느님을 믿고 자신감 있게 물맷돌로 사나운 맹수들을 막아내었던 자신의 실력을 믿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늘 인간의 힘을 더 쓸 수가 없게 되고 이제 더 이상 믿을 것이라고는 없는 극한 상화일 때 비로소 일을 시작한다는 바로 그 믿음인 것이다. 도망하는 적을 앞에 두고 용감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고 지레 불가능하다고 겁을 먹는다면 이미 그 ‘불가능’이 미리 앞을 막아서 있을 것이다. 해안을 떠날 용기가 없는 사람이 어찌 대양을 볼 수 있겠는가. 정말로 죽기도 전에 미리 몇 번이고 까무러지는 겁쟁이 아닌, 단 한 번 밖에 죽지 않는 바로 그 목숨을 담보로 싸움에 나섰던 결과로 얻은 승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