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본고는 2013년 4월, 시사주간지 원고 청탁에 의해 쓴 것으로, 원문은 그대로이나 통계수치만 현시점에 맞추었음을 밝힙니다.


정 종 암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 어림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국민들은 '아니다'고 답하기에 애완견은 물론 소까지 웃는다. 공정사회(公正社會, Fair Society)란 인간이 공동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모든 형태의 집단에서 공평하고 올바름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불공정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빛나는 이마에 군화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의사회'를 부르짖은 지가 한세대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말이 그 말인 단어만 살짝 바꾼 '공정사회'가 화두다.

 영화 '공정사회'에 왜 열광했을까

 이러한 때 40일간의 추적 실화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란 영화가 2013년 3월, 개봉돼 한반도는 물론 세계를 강타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영화가 한 아줌마의 처절한 복수극으로만 치부할 것은 아니다. 불공정한 우리 사회구조의 한 단면을 질타한다. 개인중시주의에 소통이나 나눔, 인간성 따위는 시궁창에 빠뜨린 죄의식 없는 이기주의를 꼬집으면서 우리 사회의 내일을 묻는다. 제작비 5천만 원에 거대담론도 없는 이 영화가 오늘날 대한민국 위정자와 기득권에게 무엇을 안겨주는지 알아야 한다. 국민은 공정사회를 그만큼 기대하기 때문이다.

 1인당 GNP 2만 달러와 세계경제 10위권이 외형적으로는 선진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편법과 반칙, 결과지상주의에 소외감과 상대적 빈곤층이 학대일로에 있어 사회갈등요인으로 작용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거나 불공정사회로써는 선진국은 멀고도 먼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따라서 공정사회는 우리가 진정한 선진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영화 속 아줌마는 분노의 눈빛으로 세상을 향해 포효한다. 우리 사회가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기에 작금의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힘없는 민초들의 메아리뿐이다. 어느 정권이든 난장판을 쳐도 기득권은 살아남기에 이방인의 자세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대표적인 불공정 사례

 누가 이 사회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냐. 제일 심각한 건 공무원(공기업과 준정부기관 포함)의 부정부패다. 작금에는 '공무원 범죄학'이란 대학교재까지 나올 정도로 그 부패는 할 말을 잃는다. 2014년 GDP 대비 부채만 1천209조원이다. 이러한 때 이들 중 일부는 각종 성범죄와 도박, 사기 등 강력범죄까지 저지르며 국민을 기만하는 행동을 일삼고 있다. 공직자란 이름하에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단순 경고나 징계 수준에 그치거나 처벌과정 전에 의원면직제도를 악용하여 연금과 퇴직금 수령의 불이익을 피한다. 그리고 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 임직원은 공무원과 달리 징계과정에 있을 때 의원면직 제한규정이 없기에 사직서를 내고는 타 직종으로 재취업할 수 있다. 가히 '공무원 천국'에 '도덕적 해이에 찬 천박한 심성의 천국'이다. 공무원 100만 명(공기업과 직업공무원인 군인, 국회 등은 제외된 수치) 시대로 이들 1인을 국민 40~50명이 돈 벌어 먹여 살리는 꼴이다.

 그 다음은 대기업의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경제부흥이란 기치 아래 오늘의 대기업이 국민들의 성금과 국가의 지원으로 세계 속 일류기업으로 우뚝 섰다. 그러한 은혜를 일부라도 갚기는커녕 대기업의 2,3세들은 기고만장하다. 2012년 MBC <PD수첩>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싸움을 집중 취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일방적이고 독식적인 대기업의 횡포와 상생이란 있을 수 없는 구조다.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로 원자재를 제외한 자재를 대행하는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기업까지 둔다. 기존의 납품방식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직접 납품하는 방식이었다면, 최대한 싼 가격으로 납품단가를 받아내고, 비교적 비싼 가격에 파는 방식을 통하는 구조로 엄청난 마진율과 연매출은 어마어마하다. 이에 반해,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주는 중소기업은 마진이 5%도 채 안되기에 물류비나 운송비도 건지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가권력을 비웃는다.
이들의 횡포는 여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세한 자영업자들까지 죽이고 있다. OECD국가 대비 거의 3배에 육박하는 이들의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는 치사함의 극치를 보인다. 박 대통령이 재벌 2,3세에 대하여 쓴 소리를 하기는 했다. 이들에 대한 질타가 너무 늦었지만 그 은혜를 잊지 마라는 소리는 기대되는 대목인 것만은 분명하다.

 종교의 이중성도 보자. 나눔 없는 헌금이 그렇게도 필요한지 일부 개신교는 대형건물 짓기에 박차를 가한다. 어떤 형태로든 면세로 불공정한 사회에 앞장서고 있는 꼴이다. 물질과 개인의 축복에 함몰된 채 행하지 않는 믿음을 추구하며 양극화사회에서도 종교계의 책임은 없는 듯하다. 신을 믿는 것인지, 교회를 믿는 것인지 아리송함을 더 하면서 상대방 종교를 적대시까지 한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내부 분열과 부정부패로 르네상스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한 꼴과 별반 다른 점이 없을 정도이다.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성은 더욱더 사납다. 어느 정권이든 국무위원 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노라면 썩은 환부는 변함이 없다.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세금포탈, 병역미필 등은 힘없는 민초들에게 대못을 박은 지 오래 되었지만 개선의 여지는 없다. 국회의원들은 온갖 기득권도 모자라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원의 공천권을 가지고 이들을 옥죄고 있다. 공천헌금이 오가면서 악어와 악어새로 공생관계를 맺는다. 그 공천권을 따낸 단체장 및 지방의원은 선거 때만 되면 공무원과 지역민을 줄 세우기에 바쁘다. 또한 이들 일부는 토착비리를 저지르면서 지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회는 상하부 관계없이 총체적으로 썩었다. 2012년 10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국민을 상대로 국가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정부를 믿는다는 게 수치가 10%도 안 되는 수치였다, 이유는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일관성 없는 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삼성경제연구소의 OECD 29개국 중 사회적 자본조사에서도 신뢰도는 24위를 차지했다. 2014년 12월 조사에서 경찰에 대한 신뢰도는 34개국 중 두 번째로 낮았다.

 이러한데도 전 정부까지는 주요 실천과제로 '공정한 법제도 운영의 부패 없는 사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특권 없는 사회, 건강한 시장경제로 활력 있는 사회, 약자를 배려하고 재기를 돕는 사회'를 꼽았다. 하나도 실천된 게 없어 보인다. 단지 구호에 불과했다는 게 위 사례에서도 보았다.

 그렇다면 불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첫째, 정직과 성실이 대우받는 시민의식의 선진화다. 황금만능주의와 지위가 높아도 정직과 성실이 바탕인 삶의 자세와 준법정신 함양이다, 둘째,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 확산이다. 고위층이나 기득권층의 솔선수범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없애야 한다. 셋째, 온정주의(溫情主義, paternalism)를 타파해야 한다. 이 사회에 패거리가 상존해 있는 온정주의적 문화 배격이다. 넷째, 경제성장기에 은혜를 입은 대기업의 기부문화 확산이다. 자선가로서의 명예욕이나 허영심마저 버린 현자(賢者)에 가까운 미국의 최고 갑부 '위렌 버핏'과 '빌 게이츠'는 부시 대통령이 상속세를 폐지하려들자 "상속세는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부유층에게 특혜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상속세는 필요하다" 고 거세게 반발한 자세를 본받아 한다. 다섯째, 공정한 법집행이다. 특히 공무원 범죄는 일벌백계의 처벌이어야 한다. 또한 권력자나 대기업 총수에게 관대한 법집행으로도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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