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해 주는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권리를 타인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타인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도 있다. 이들 중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뒤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사람들의 내심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어느 집단 또는 어느 친구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의무를 한정시킬 때부터, 또 자기는 몇 천만이라는 사람들 속에 단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일 개인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때부터 그는 오직 사람의 얕은 '꾀'라는 위태로운 무기로 세상과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을 일컬어 소우주라 한다면 천지는 대우주이다. 우주 자연계는 모두 한 가지 법칙에 따라 운행하면서 그 법칙에 따라 만물을 생장케 하며, 그 법칙을 벗어날 때 우주는 즉시 궤멸되고 말 것이다. 소우주인 우리 개인은 나름대로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데 그것이 바로 희로애락의 감정 조절이고, 대우주 역시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으니 그것이 사랑과 자비인 것이다. 이런 법칙은 조직 속의 경영진과 근로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을 매우 중히 여긴다. 사람과 만물의 관계에서도 바로 그 인연을 제거해 버릴 수도 없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은 더욱 중히 여긴다. 여자가(大)가 신방(口)안에 들어가서 남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因) 이것이야 말로 인륜지 대사인 큰 인연이고, 산돼지(彖) 앞에 장애물 없어 달아날 수 있는 길과 그물(絲)에 걸려 들 두 길이 있을 때 올가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돼지의 선택 행로에 따라 되지 고기를 포식할 수도 있고 허탕으로 끝날 수도 있는 모습(緣)을 상형하여 합성한 것이 인연(因緣)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 이 길이 곧 하늘(극락)에 닿는 길이니 우리 인간은 이 길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또 부처님은 길고도 질긴 윤회의 고리를 초월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기독교 또한 전지전능이자 사랑의 본체이신 하느님과 결함투성이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된 신앙의 목표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또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나 여호와 하느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 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느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십계명 중 이 몇 가지 계명은 계명을 지킬 때 보상의 약속이 덧붙여 진 것이 있다.
 우상을 만들 때 삼사 대 까지 죄 갚음을 한다거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약속과,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긴 생명을 준다는 보상 등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盡人事 待天命)가 말해주듯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으니 성사 여부는 하늘에 맡기라는 데서, 엿새 동안 열심히 일 하고 하루를 안식일로 하여 바로 그 성사의 열쇠를 쥔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송축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과 부모에 대한 공경의 표시인 경천 효행(敬天孝行)을 그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으니, 약간의 표현 형식상의 차이에 불과하게 보일수도 있다.
 동양에서 주로 천도(天道) 또는 인연(因緣)으로 표현되는 이 ‘이음’ 또는 ‘묶음’의 끈이 서구로 가면 연맹(league), 포위하다(beleaguer), 묶는 데 쓰는 끈(ligature), 관절의 인대(ligament), (규율로 사람을 묶는) 법의(legal), 합법의(legitimate), 불법의(illegitimate), (연계성을 근간으로 하는) 논리(logic), 충성의(loyal), 읽을 수 있는(legible), 법적 책임이 있는(liable) 등에서 보여주는 묶음 또는 끈 등을 기본으로 하는 어군들로 구성된다. 그들 또한 인간을 하나로 감싸고 묶어주는 사회성 또는 결합성이 언어를 통해 우리 인간생활에 깊숙이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일의 시원이자 출발인 그 하늘에게는 천시(天時)가 있고 땅에서 생산되는 재화에는 지리(地利)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그것을 다스리는 정치가 천시와 지리를 따른다고 할 때 이를 조화가 이루어진 하나 되는 모습이라 할 일이다. 숱한 별들이 서로 일정한 법칙 아래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비추며, 사계절은 때를 따라 임하며 음과 양은 만물을 변화시키며, 비바람은 널리 고루 뿌려진다. 그리하여 만물이 조화를 얻어 생육하며 저마다 양생하는 바를 얻어 성장하는 데, 그 일은 보이지 않아도 그 공은 보이니 이것을 신통하다 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두 그 완성된 바를 알지만 그 공은 알지 못하니, 바로 그것이 하늘의 공덕인 것이다. 하늘의 직분은 이미 성립되어 있고 하늘의 공덕은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의 형체도 이미 갖추어지고 정신이 생겨 희로애락 등의 감정이 모두 내적으로 갖추어진 천정(天情)또한 갖추어져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 된 인간’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인간은 자연(하느님)과 사회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범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 반면에 이성(理性)의 힘에 의하여 비록 어떤 법칙 아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주체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지배당하고 있음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 인간의 가치가 존재한다. 도와 하늘과 땅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그 조화의 길로 조절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바탕은 하늘과 다를 게 없다. 일념(一念)의 기쁨은 하늘의 별과 아름다운 구름과 같고, 일념의 분노는 성난 우레와 사나운 비와 같다. 또 일념의 인자는 부드러운 바람과 달콤한 이슬과 같고, 일념의 엄숙은 뜨거운 햇빛과 찬 서리와 같으니 어느 것인들 없어서는 안 된다. 다만 생길 자리에 생기고 스러질 자리에 스러져 시원스럽고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데, 이럴 수만 있다면 곧 하늘과 더불어 바탕을 함께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늘로 부터 부모, 나, 그리고 자손으로 이어지는 효(孝) 중심의 수직 관계든, 아니면 인간끼리의 어울림을 강조하는 사회성이든 인간은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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