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정말 살기 힘든 세상처럼 느껴진다.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위에 돈이 군림하는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되니 사람들의 눈에는 사람이 안보이고 돈만 보인다. 사람이 돈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지!” 라고 입으로는 읊조리면서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돈 앞에서 고개를 숙이다 못해 엎드려 절까지 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최악의 가치다.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불치의 돈병에 걸려서 이 사회는 불치의 돈병 환자들로 차고 넘친다. 치료할 약이 없다.
 돈으로 권력도 사고 돈으로 지위도 사는 시대가 되었다.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비자금으로 불법으로 조성하고 권력을 지닌 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비리와 부정을 끊임없이 저지른다. 돈을 많이 내야 극락도 가고 천당도 가는 시대가 되었다. 귀신도 하느님도 돈을 사랑하고 요구한다. 돈 없는 사람은 인간취급도 못 받는다. 스님도 목사도무당도 돈 바치기를 요구한다. 돈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돈이 없으면 노예나 종처럼 불행한 삶을 유지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돈이 없으면 죽어도 묻힐 곳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고 윤리나 도덕이나 자존심까지도 팽개쳐진지는 오래 되었다. 심지어는 부모형제도 돈 때문에 원수가 된다.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마치 낚시에 꿰인 미끼를 물듯이 돈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디든지 간다. 못하는 짓이 없다. 어찌 보면 이 사회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동물의 세계로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어 윤리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그것이 당연시 되었다. 필자는 현 시대의 부정적 상황을 들추려는 것이 아니고 돈 때문에 젊은이들이 결혼도 아니 하고 자식도 출산하지 않는 비극이 우리사회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돈과 자녀출산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조상들은 자식을 농사짓는 것으로 보았다. 봄부터 가을 추수 때까지 정성을 들이고 피땀을 흘려야 알곡을 추수할 수 있듯이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 좋아야하고 그리고 농토의 흙이 좋아야하고 수리시설이 좋아야하며 잡초를 뽑고 물길이 좋아야한다. 그런 다음 농부의 정성이 필요하다. 자식농사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출산을 했는데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면 그 자녀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죽는 고통의 수십 배 수천 배를 당하며 살게 된다. 책임질 수 없다면 자식을 절대 로 낳지 말라. 태어나서 평생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휠씬 더 크다. 그 고통은 부모가 자녀를 낳는 그 순간 물려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애완견보다 못한 것은 애완견은 적어도 안락사 시킨다. 그런데 인간은 죽고 싶으면 안락사가 허용이 안 되어 끔찍하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며 자살한다.
부모의 자녀 출산은 대부분 부모 자신을 위해서이다. 대를 잇기 위해 출산을 한다. 자녀가 있어야 가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고 부부간의 애정이 더욱 깊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은 낳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모를 위해서 인가? 자식을 위해서 인가?
 따지고 보면 자식을 낳은 이유가 부모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다. 자식은 부모의 애완동물 취급을 받으며 자란다. 자식이 성장하면 그 보답을 부모에게 하라고 요구하며 애완동물에서 애물단지 취급으로 바꿔버린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이유를 질문해보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자식을 낳아야 가족을 이룰 수 있고 화목해 질수 있다. 결혼생활에 자식이 매개체가 되어 오래 유지 할 수 있다. 자식이 있어야 외롭지 않고 심심하지 않다. 자식은 혈육으로 나의 영원한 동반자다. 자식은 내가 늙으면 나를 보살필 것이다. 자식이 많으면 내 생신, 환갑이나 내가 죽으면 사람이 북적거려 보기 좋은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야 자손이  번창 한다.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자식을 위해 자식을 낳는 부모는 거의 없다. 부모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는다는 결정을 하고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책임도 부모가 져야 한다. 잘난 자식도 있고 못난 자식도 있을 수 있다. 모두 부모의 책임 아닌가! 정작 자식은 낳아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자녀는 고생하고 살면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지 못해 살아간다.
 부모들은 자식을 낳으려면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자식이 평생 살아가면서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식을 낳으면 미안해하고 죄짓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고통 받게 한 죄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을 때는 똑똑한 자식을 낳아야한다. 그러지 못할 바에야 아예 자식을 안 낳는 것이 차라리  바람직하다. 모든 사회에서 자녀는 가족생활을 정의하는 데 절대 필요하며, 많은 사회학자들이 자녀양육을 가족의 첫째가는 기능으로 간주하고 있다. 출산은 생물학적, 사회적 현상이다. 자녀출산으로 부모가 된 남편과 부인은 역할 재조정이 필요하다. 자녀출산 후에 부모들이 적응하는 모습은 개인적 환경과 문화적 관습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 사회에서 과거와 현재에 자녀를 돌보는 데는 부모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옛말에 “삼대 부자 없고 삼대 거지 없다”라고 했지만 이제 시대가 변해 한번 부자 되면 영원한 부자요. 한번 거지되면 영원한 거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재물도 대를 이어가며 가난도 대를 이어가는 시대이다. 한 세대가 가난에 빠지면 몇 세대가 흘러가도 가난에서 탈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발전이며 모순이다.
“어떤 이는 권력과 재물의 풍요 속에 긍정적인 삶을 유지하며 어떤 이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가난과 부정적인 삶을 유지하는가?” 이다.

 자녀를 아무렇게나 만들지 말라. 아무런 목표와 계획 없이 자녀를 낳았다가 부모와 자녀는 한평생 불행해진다. 잘못 출생한 자녀는 부모의 업에 의하여 번뇌에 쌓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녀의 출산은 매우 치밀한 계획과 관리가 필요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자녀를 출산하게 되면 자녀는 성장하여 노예나 종살이 밖에 더 할 일이 없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주인과 노예이다. 주인은 낱말 그대로 갑의 위치를 말하며 고용주를 말한다. 노예는 낱말 그대로 을의 위치인 고용인을 말한다.
 당신의 자녀가 성장하여 고용인으로 노예 같은 삶을 한다면 당신은 자녀출산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노예의 삶이 그렇게 사치스러운 것이 아님은 당신들도 잘 안다. 자녀가 한평생 가난과 고통과 차별과 냉대 속에 서 보낸다면 그 고통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것은 순전히 부모의 책임이다. 책임지지 못할 자녀를 함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녀의  성장후의 교육비 그리고 자녀의 직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부모가 자녀 한명을 대학까지 졸업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평균 2억7500만원이(2010년 기준) 들고 그중 교육비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나타났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2010년 기준으로 (지금은 4억 이상으로 더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자녀 1명당 대학 졸업까지 드는 비용이 2억7514만원이 든다고 하였다. 연령대 별로 보면 영아기 2466만원, 유아기 2937만원, 초등학교 6300만원, 중학교 3535만원 , 고등학교 4154만원, 4년제 6811만원으로 나타났다. 이중 양육비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
 자녀 1명당 월 지출을 보면 영아기 12.1%인 8만원, 유아기 32.6%인 27만원, 초등학교 36.3%인 32만원, 중학교 39.1%인 38만원, 고등학교 43.1%인 50만원, 가장 높은 대학교가 44.8%인 64만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5년 전의 비용이니 지금은 자녀양육에 필요한 비용이 거의 2배에 가깝다. 이처럼 양육비이 부담이 저 출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라면 출산율을 높이려면 교육비를 포함한 양육비를 해결해야 한다. 1인당 4억에 가까운 돈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부모의 부담이 이처럼 큰데 어떻게 아이를 낳고 살겠는가. 거기다 집값까지 포함한다면 보통 평균의 사람이 평생 벌어야 할 돈은 대략 10억 가량 될 것이다.

 생물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된다.(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걸 적자생존 [適者生存]: 생물의 생존 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는 현상) 이라고도 한다. 잘못한 게 없지만 단지 먹이사슬 하부에 위치한 생물로 태어난 이유로 더 강한 동물에게 잡혀 그들의 오락거리가 되고 그들의 먹이가 된다는 현실을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그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이치로 알고 지내왔으니까. 아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먹이사슬은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환경 보존의시스템이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처럼, 빠르고, 힘이 세고, 영리한 놈이 천적으로 부터 살아남는다. 그리고 힘이 센 개체가 후손을 남긴다. 힘이 센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여자가 돈 많고 재력 있는 남자, 혹은 근육질의 남자를 원하는 것도 세월이 흘러 흘러 살아남기 위해 새겨진 X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본능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편히 쉬고 있는 개울가도 원래는 먼 옛날 호랑이와 늑대의 보금자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리한 인간은 타고난 약한 몸을 극복하고, 동물들을 몰아낼 수 있는 각종 도구와 덫을 개발했고, 원래 우리보다 먹이사슬 위에 있었던 강력한 이빨과 발톱, 근육을 가지고 있는 육식동물들을 몰아내고 인간 사회를 만들었다.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은 결국 먹이사슬 최상단에 올라가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생물체로서는 적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힘 있는 개체의 일원으로서 이렇게 개울가 근처에서 평화로움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 평화로움 속에는 여전히 적자생존의 법칙, 약육강식의 냉정함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잔혹하다. 강한 놈은 살고 약한 놈은 도태된다. 끝까지 사는 놈이야말로 강자고, 결국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그것은 생태계의 불변의 시스템이다.
 경쟁 없는 사회. 누구나 다 똑같이 평등하게,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 그것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세계가 아닌 가 싶다. 당신의 자녀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똑똑한 자식을 만들어 낳아라. 그렇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불행을 공유하지 않는 삶이 될 것이다. 자녀도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씨앗을 잘 보존하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땀과 정성을 들여야 가을이 되면 풍년을 맞이할 수 있듯이 자녀 출산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만들 때는 부부관계도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바르고 지혜로운 맑은 정신으로 해야 하고 태교도 정성껏 해야 하며 자녀출산 후에도 양육과 교육을 잘해야 지혜가 뛰어나고 훌륭한 인간이 된다. 자녀농사를 위한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쭉정이가 되어 한평생 고통의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옥한 땅을 만들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 우량씨앗을 알맞게 뿌려서 씨앗이 잘 움트게 해야 하듯이 자식도  황무지에다 무더기로 뿌려서 쭉정이 자식만 양산해서는 굶어죽기 십상이며 이 사회에 살아남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런 계획 없이 자식을 낳는 것은 자식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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