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세상에 질병이란 것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은 언제 누구에게나 떨쳐버릴 수 없는 무거운 인생살이의 주제이자 관심사일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인류가 역사의 첫 발을 떼는 바로 그 날 부터 질병이 인간의 삶과 함께 그 맥을 이어왔다.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그 곳 토양이 오염되기 시작하였고, 소나 말 등 가축들에게 기생하던 세균이 인간에게 옮겨왔다. 동물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생태계가 오염되면서 인간에게 전염병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문명의 발상지가 곧 전염병의 발상지가 되는 셈이다.
 인류 시원문명과 함께 발생한 인류 최초의 질병은 시두(時痘 천연, 두창, 마마)로 추정된다. 전염병은 개인에게는 물론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해 왔다. 질병으로 사회가 무너지고 가치관이 붕괴되고 종래의 생활양식 또한 그 의미를 잃게 된다. 문명이 질병을 만들고 질병이 문명을 만들어 온 것이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도시로 몰려 든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던 도시국가 아테네가 힘도 쓰지 못한 채 전염병으로 몰락한 다음 뒤를 이어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제국 역시 전염병의 공격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동양의 유목민 훈족(고조선의 한 갈래)이 몽골 고원에서 유럽에 이르는 대 이동을 통하여 시두를 옮겨갔고, 훈족에게 고향을 빼앗긴 민족들이 로마 제국으로 이동함으로써 이 병이 로마로 퍼진 것이다.

 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로 불리는 흑사병이 중국의 운남성에서 발병하였다. 몽골군이 운남성을 공격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옮겨 간 흑사병을 북경에서 크게 창궐하면서 북경인 3분의 2가 전멸하는 재앙으로 몰고 갔다. 1,346년 흑사병은 현재 크림반도의 항구 도시인 카파(Kaffa)에 도착하였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을 기습한 흑사병으로 쓰러진 시체들은 투석기에 실려 성벽 안으로 날아가 여기 저기 떨어졌다. 성 안의 사람들이 이들 시체를 성벽 너머 바다로 다시 던져 버렸지만 흑사병은 이미 성 안에 퍼진 상태였다.
 몽골군이 철수한 뒤 성 안에 있던 제노바 상인들은 배를 몰고 이탈리아로 향했고, 그들과 함께 흑사병도 지중해의 다른 항구로 빠르게 번져나갔고, 이어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전 유럽인구 3분의 1을 전멸시키기에 이른다. 흑사병은 성스러운 교회나 성당이라 하여 피해 가지는 않았고 인간의 의식과 태도마저 변화를 가져왔다. 또 수많은 농노의 죽음으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임금이 상승하게 되었고, 세력이 커진 농노들이 귀족의 부와 권력을 잠식하여 차츰 소작인, 소지주 또는 장인으로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엄격했던 사회 계층 구조가 흑사병에 흔들려 유럽의 중세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근대 자본주의를 발흥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앞서의 시두에 면역된 유럽인들이 남북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무방비였던 원주민들에게 병을 옮겨 그들을 거의 전멸시키면서 두 대륙 전체를 손쉽게 손아귀에 넣기도 한다.

 이 시두를 우리나라에서는 마마(上監媽媽)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늘의 뜻을 받아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인 왕에 대한 존칭이니 하늘(天 또는 神)의 대리자라는 의미에서 신(神)에 버금갈 정도의 높임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의술이라는 불경스러운 방법으로 치료에 나서서는 안 될 일이고 오로지 경건한 자세로 신(神)의 처분에 맡기면서 그 결과 또한 경건한 자세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마마’로 부르게 된 이유가 된다.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 가운데 왕자가 마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어의(御醫) 허준(許浚)이 왕자를 치료하여 건강하게 회복시킨 일이 있었다. 하늘(神)의 처분만을 경건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고 인간의 힘으로 치료하게 된 획기적 사건을 맞이한 것이다. 착수 후 15년에 걸친 광해군 때에 완성을 보게 된 어의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의 주술적이고 구복적인 차원의 인체론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하늘의 법칙에서 가져 온 인체과학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것도 이 때 일이다.
 정(精), 기(氣), 신(神)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내장기의 생리적 기능변조 가능성과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증세를 다루는 과정에서 고금의 각종 의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여러 가지 치료 방안을 취사. 선택한 후 실제 임상 경험을 거쳐 치료에 효과가 있는 핵심만을 뽑아 정리한 것이다.

 자연을 닮은 인체로 정의한 동의보감은 당연히 자연의 원리 준수를 그 근간으로 한다. 춘하추동의 순리, 밤과 낮의 질서, 음과 양의 조화, 인륜의 구현,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수입된 명나라 초기의 의학이 당시의 어의 양예수가 지은 ‘의림촬요’ 등을 통해 허준에게 전해졌고, 이를 근간으로 허준이 쌓은 새로운 지식으로 분류 정리한 것이다. 중국과 함께 조선의 경우도 예부터 의학의술의 전수가 이어져 왔고 고려 말엽부터도 향약 사용법의 전통이 전통계승이 있었고 이를 체계 있게 집대성할 조선의학 독자성을 담보하는 실증자연의학의 태동의 기반이 열정의 의성 허준을 만나게 된 것이다.
 허준은 동의(東醫)의 체계를 구축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인간사회의 보편적 질서인 인륜의 차원으로까지 연계시키려 했다. 인륜에 바탕을 둔 자연학,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우주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의학 서적이 탄생한 것이다. 백 마디의 말 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게자신의 뜻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의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와 땅을 나타내는 몸, 그리고 이들을 인체의 척추가 연결하여 하늘과 땅의 선천적 기운에 인체의 후천적 기운을 소통 순환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우리는 본연 또는 자연을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상태로 보는 반면, 무언가 인간의 흔적을 자연에 새긴 문화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과 문화를 상대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면 옛 사람들이 생각했던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동의보감에는 각종 질병에 따른 처방을 상세히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한 가지 약제만으로 병을 다스릴 수 있는 단방(單方) 치료법을 주로 열거하였다. 약 만으로 효과가 없을 경우에 쓸 수 있는 침구법도 덧붙여서 완벽한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약재에 있어서도 중국산과 국산을 구분하여 국산 약재는 산지, 지역별 명칭, 채취 계절과 제약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하여 약재를 구하기 쉽도록 했다.
 또한 처방의 출전을 밝혀서 질병에 대한 고금의 치료 방법을 계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민간요법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무엇보다도 정확성과 함께 실제적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취급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게 재정립한 작품이기에 한방의학(韓方醫學)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 역작인 것이다. 또한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는 인술로서의 의학을 대했던 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보여 준 참으로 위대하고 고귀한 업적이다.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하고 특히 사람 살리기를 좋아한다는 우리 동이(東夷) 겨레의 참 모습을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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