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종교부흥의 특징은 인간들의 삶이 궁핍해지고 정신적 불안상태가 높아질수록 번창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욕구들이 능력의 한계에 당면할 때 신[神]의 도움을 통해서라도 성취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종교가 번창하고 있고 그 폐회 또한 엄청나며 종교의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 매우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종교가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신[神]이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있으며 세상만물의 주관과 긍정적 이치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神]이 현재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전혀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으면서 오로지 인간이 죽은 후의 생활만을 보장해준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살아있을 때의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죽은 후의 일에 대해 보장해준다는 논리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비인간적인 죄악들이 마치 독버섯처럼 지천에서 일어나는 것을 방치한 체 그것은 오직 말세의 징조라고만 떠벌리고 있다. 종교는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인간사회와 분리해서 생존할 수도 없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神]도 결국에는 인간에 의해 증명될 뿐이다. 필자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그들의 신[神]도 우리사회에 공존하는 한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2014년에 상영된 영화 [쿼바디스]는 한국 대형교회의 부끄러운 실상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쿼바디스]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부끄러운 실상을 담았다. 대형교회가 건물의 규모 등 외적인 부분에 집착하면서 신도 수를 늘리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종교의 기업화'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담임목사가 아들에게 교회 내의 지위를 물려주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것도 그렇고, 물러나는 목사에게 '전별금'이라는 명목으로 수십억 원의 돈을 퇴직금처럼 지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점점 커졌고, 예수는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고, 아들 목사가 다음 주인이다. 다들 탐욕에 미쳐 버렸지만 교회엔 침묵만 흐를 뿐이다.

 2010년 6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서울 각지의 교회 신도들. 이날의 행사는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됐다. 기도회를 진행하는 사회자인 목사가 단상에 오르고, 그 옆에 마이크를 잡고 누군가가 함께 서 있다. 그 남자는 바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으로 이날 행사를 위해 한국 개신교가 초대한 손님이었다. 카메라는 신도들의 열성적인 참여로 대성황을 이룬 '평화기도회'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방송에 출연한 부시 전 대통령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확신에 찬 발언을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2003년 미국은 UN과 유럽 다수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의 명분이던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부시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이라크 침략전쟁에 의해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는 사실에)이라크 국민을 무고하게 살상한 전쟁 놀음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20여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 그 전쟁을 직접 승인한 인물을 '평화기도회'의 간증인으로 초청한 한국 교회의 기막힌 현실이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전개된 것이다.
 세상의 가장 완벽한 거짓말은 99%의 진실과 1%의 거짓으로 거짓의 본연의 의도를 가리고 정반대인 진실인 것처럼 꾸며 거짓의 의도를 관철시킴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듯한 진실들로 꾸며놔 모두가 사실인 것처럼 현시대의 부정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속엔 "음흉한" 그들만의 목적의식이 담겨있다. 종교의 부패. 정부의 부패, 기업의 부패 ,이미 전 국민 아니 초등학생들도 보고 느끼는 것들이다.  현 세상의 타락, 부패, 믿을 것 돈밖에 없는 것. 무참히 인류를 유지해온 희망에 대한 가능성들을 모두 폐기처분시켜버린다. 세상과 권위에 대한 불신, 물질주의, 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과학이다.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우리의 몸과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펼치는데도 아이러니 하게도 국가, 기업, 종교, 모두가 물질주의로 인해 부패되고 변질되었다라고 지적하면서,  최첨단 물질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물론 우리의 삶을 육체적으로 편하게 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어떠한가?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정보화 시대로 인한 경쟁과열,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 요즘시대의 성향은 어떠한가? 매우 사납다. 자기밖에 모른다. 개념상실, 도덕? 그냥 웃음밖에 남지 않는다. 우리사회는 부정부패, 도덕적해이가 도를 넘었고, 이념, 계층, 지역적 갈등은 불신분열주의, 물질주의, 기회주의라는 암적 요인을 만들고 있다. (참조: 다음 블로그)

 2014년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카톨릭의 교황이  한국의 반민주적인 행태와 물질주의[物質主義:정신적인 가치보다 돈이나 육체적인 쾌락과 같은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말한다.]에 대해 분명하게 각을 세워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신도들에게 이러한 물질주의를 멀리하고 맞서 싸울 것을 권고하였다. 예수도 성경에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나 많은 개신교 교회들은 부자와 권력자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박근혜의 전임자인 이명박은 개신교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침몰한 세월호의 부패한 소유주 유병언도 마찬가지이다. 교황은 경제성장과 성공한 자들의 국가인 우리나라의 신자들에게 물질주의[物質主義]에서 멀어질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특히 국가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돌볼 것을 촉구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종교에 대한 불신은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에 팽배하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나쁜 요소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며 인간의 죄악이 극대화 되고 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물질에 지배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신자들도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풍조를 보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고, 세상 풍조에 휩쓸려 가는데, 돈을 너무 사랑하게 만드는 사회 환경 속에서 모순적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 누구 말대로 하나님은 약속어음만 주시고, 믿음이 약한 인간은 현찰을 가지고 안심하고 싶어 한다. 결국 온전한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문제이다.
이 시대에 부자의 많은 돈의 좋은 면을 부인하고, 아미쉬[전기와 전화 등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이들만의 집단생활을 영위하는 개신교의 한 갈래] 같이 가난하고 검소하게 집단적 공동체로 살아가는 신자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거의 다 돈의 위력에 무릎 꿇은 형상이다. 나 자신도 경건 청렴결백하게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른 삶과 육신이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결단해야 할 문제이다. 믿음과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이 문제이다.

 이 세상이 거의 전체적으로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시대가 된지가 1991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주의 실패 선언 이후, 수십 년이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인류가 이 불신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이루었는지 의문이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경제적으로 나쁜 제도이지만, 민주주의도 정치적으로 나쁜 제도로 부각되고 있다. 불안하니 어느 정도 안심하게 하는 돈의 노예가 되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돈이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인간을 하나님이 다스리게 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다수결로 의결하여 다스리는 법을 정하고 있다. 인간 사이의 평등주의도 민주주의, 우민 다수결 주의의 착각이다. 너도 나도 다 같은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부정부패는 점점 교묘하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개신교 사회에서도 조직된 대 교회가 큰 목소리를 내고, 기독교 사회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는 것이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역시 이런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나쁜 영향을 부지중에 받고 있다. 불행하게도 개신교회는 이런 자유 민주, 자본주의를 아주 잘 닮았다. 그러니 개신교회가 이기적이며 자본의 영향력을 크게 받으며 참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 이런 변질된 교회 구조 안에서 사는 교인들이 잘못되고 타락의 길을 가기가 십상이다. 현대의 풍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신교의 번영신앙 등에 영합하여, 소위 지상에서 축복을 받아 돈 잘 벌어 풍성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되었다.
 요즘은 세상에서 축복받아 헌금 많이 하여 교회당에서 필요한 경비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들도 돕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러다가 천국에도 간다는 식이다. 그러나 부자 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그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이지, 정당한 방법으로는 그렇게 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칭찬 받기는커녕 부당한 방법, 부정, 착취, 죄, 이것은 신[神] 앞에 정죄 받을 일인지도 모른다. 종교의 존재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다. 인간에게 불행을 자초하는 종교는 하루빨리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한다. 종교가 인간 위에 군림할 때 인간은 불행해지며 노예의 생활로 접어든다. 이성적사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광신종교에 현혹되거나 우롱당하지 않아야 한다. 종교지도자라고 일컫는 자들이 미망에 빠져든 세력을 규합하여 그 위상을 유지한다면 세상의 갈등만 증폭시키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진정한 인본주의로 돌아와야 한다. 종교는 우리의 전통 사상인 ‘홍익인간’이나 ‘인내천[人乃天] 사상 뿐 아니라 모든 현대 종교가 추구하는 ’인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

 신([神])은 인간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실체가 없는 무상[無常: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에 나고 변화하고 멸하므로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뜻]의 우상[偶像]이다. 그러므로 신[神과 인간은 공존하며 인간이 없는 곳에 신[神]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아울러  아무도 신[神]의 실체를 증명해주지 않는다. 신[神]의 존재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다. 신[神]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런 신[神]은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神]에게 자신의 행복과 욕구가 충족되기를 구하며 소원이 성취되기를 요구하기도 하고 정신적 위안을 삼는다.
 신[神]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불교의 석가는 인간에게 자비와 무상보시[無相布施:오직 베풀기만 할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시]를 요구한다. 예수도 무상보시[無相布施]를 요구하나 그 표현은 다음과 같다:[마태복음서: 한 청년이 예수께 말하되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으니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말하되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사람들이 베풀지 않고 소유하기만을 바라면서 신에게 축복받아 행복하기만을 기도한다. 모두가 신[神]보다 물질을 더 숭배하는 어리석은 물질주의[物質主義]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신[神]의 이름으로 도덕적 해이[道德的 解弛]와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를 합리화하는 명분은 이제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종교는 깨달아야 한다. 종교는 그 본래정신으로 돌아가 그들이 해야 할 사명감을 하루빨리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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