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정계에 입문하여 큰 부를 모아 성공적으로 은퇴한 퇴역 정치인에게 물었다. ‘그 처럼 부귀를 한 몸에 모으면서 성공으로 이끌어 나간 비결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오줌을 눌 때 한 쪽 다리를 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건 쉽군요. 어, 하지만 그건 개나 하는 천박한 짓 아닙니까 ?’ ‘바로 그겁니다. 요즈음 개 같은 짓 안하고 돈 모으는 사람 봤습니까 ?’ 정치인들 앞에서 이런 소릴 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사람을 웃기기 위한 우스갯소리다.
 어느 가난뱅이 청년이 만석꾼 부자에게 찾아 가 부자 되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부자는 청년을 데리고 우물가로 가더니 우물위에 드리워져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한다. 그러자 청년이 나뭇가지가 거의 부러질 정도로 높은 데로 올라갈 때를 기다려 나무 위를 쳐다보던 부자가 말한다. 이제 거기서 한 손으로만 나무에 매달리시오.’ 한다. 그러자 청년은 죽을힘을 다하여 한 손으로 가지에 매달렸다. 부자는 또 명령한다. ‘이제 매달린 손을 놓으시오.’ 안 그래도 이마에 힘줄이 솟으면서 젖 먹던 힘으로 매달려 기진맥진하여 손을 놓칠 지경인데 그것도 모자라 죽으라는 말이냐는 부아통이 터지면서 서둘러 나무에서 내려왔다. ‘아니, 나무에 매달린 손을 놓으면 난 우물에 빠져 죽으란 말이요 ?’‘바로 그거외다. 앞으로 한 푼의 돈을 쓰게 되더라도 이 돈 한 푼에 목숨이 걸린 것 같은 아까운 마음으로 쓰라는 말이 외다.’ 어쩐 일인지 우리나라에서 ‘부자(富者)’라 하면 내심 그다지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있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아닌 모든 외국의 경우 부자에 대한 나쁜 관념은 별로 없다. 우리 자신들의 일반적인 정서인 남이 잘되는 데 대한 배 아픔에 탓을 돌리기도 하지만 부자 자신들의 도덕성 또는 사회성 결여가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부(富 richness)란 정직하고 정의로운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부자 될 권리가 당연히 주어지는 개념으로 이해하기에 부유한(rich)이 정의로운(right), 바르게 고치다(rectify=correct), 곧바른(direct), 왕의(royal), 정권(regime), 권리(rights)등과 같은 정당성과 그 정당성을 기본으로 하는 왕권(royal)에 이르는 어찌 보면 폭 넓은 관용을 베풀고 있다. 우리야 말로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절실히 요망되는 현실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으로 인하여 생겨난 사자성어인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있기까지에는 부차의 신하였던 손무(孫武), 오자서(伍子胥)와 구천의 신하였던 문종(文種), 범려(范蠡)의 조역이 큰 역할을 했다. 구천이 부차에게 묵은 빚을 갚고 이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외에 할 일이 일게 된 범려가 동료 문종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버렸다. ‘비조(飛鳥)가 사라지니 양궁을 거두어 넣고, 교토(狡兎)가 죽으니 주구(走狗)를 삶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월왕이 고생은 같이할 수 있어도 기쁨은 남과 나누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또 다른 한 통의 서신은 구천에게 남겼다. ‘주군께서 괴로워하실 때는 분골쇄신하며, 주군께서 모욕을 때는 생명을 내던지는 것이 곧 신하의 도리입니다. 왕께서 부차에게 치욕을 당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살았던 것은 오로지 오나라에 보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목적을 다한 지금이야말로 그 죄를 보상받고 싶다고 여기나이다.’ 범려는 제나라로 온 후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새로 지어 해변에서 자식들과 함께 땀 흘리며 밭을 갈아 재산을 모으는 데 힘써 큰 부를 이루었다. 그는 제나라에서 재상 자리에 대한 제안이 왔을 때 말했다. ‘들판에서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관가에서 재상 자리에 오른다면 그 이상의 영달은 없다. 하지만 영예가 길게 계속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 그리고는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몰래 마을을 더나 도(陶) 지방으로 이사했다. 도 지방은 천하의 중심지로 물자의 유통이 활발한 요로였다.
 경제활동에는 이 이상 유리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아들과 더불어 노 물가에 변동을 가져오는 물건들을 다루어 손쉽게 거만(巨萬)의 부를 이루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차남이 초나라에서 살인을 하여 붙잡혔다. 그는 막내아들에게 거금을 주어 초나라로 보내어 차남 구명공작을 하기로 하였으나, 장남이 강하게 나서는 바람에 책임은 그에게 돌아갔다. 장남은 아버지의 지인 장생(莊生)에게 천금의 돈을 내밀면서 아우의 구명을 부탁하고는 그것도 못미더워서 별도로 모든 초나라 실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 초 왕은 별자리를 살피다가 불길함을 느끼고 장생에게 대책을 묻자 왕이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데서 대사(大赦)를 선포하기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장남은 장생을 찾아갔다. ‘아우는 공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사면이 결정 되었습니다’ 하면서 맡겼던 돈을 찾아갔다. 장생은 차남의 사면 후 돌려주려고 했던 참이라 선 듯 내어 준 것이다. 그리고 장생은 왕을 찾아가 고했다. ‘대사(大赦)는 초나라 백성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하는데 도주공(陶朱公)이란 자가 그의 아들을 살리려고 돈을 뿌리면서 구명운동을 한다하니 이래서야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화가 난 왕은 차남을 처형하고 장남은 아우의 시신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일의 결말을 범려는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생하며 자란 장남은 돈에 대한 애착이 커서 이 일에 실패할 것이 뻔하고, 부자가 된 후에 태어난 막내라면 후하게 돈을 슬 수 있어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 임상옥이란 거상이 있었다. 소설 또는 사극으로도 여러 번 방영되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어릴 적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 낙방을 했지만 그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우게 되어 장사에 큰 무기가 되었다. 역관도 못 되고 빚더미에 앉게 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난을 대물림으로 물려주었고 임상옥은 만상(상단 이름)의 집에 노비로 있다가 그의 재능을 알아 본 만상이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면서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장사로 성공한 후 기민(饑民) 구제사업 등으로 천거 받아 곽산군수가 되고 의주 수재민을 구원한 동으로 구성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그 후 빈민 구제, 시, 술로 여생을 보냈다.
 그가 후세 경영인들의 귀감이 되는 이유는 단순한 상재를 넘어 사람을 중시하는 장사꾼이라는 데 있다. 그는 거상임에도 불구하고 돈에 크게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신용위주의 장사를 했다. 나중에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채소밭 하나를 일궈가며 조용히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처음으로 중국에 갔을 때 한 청루에 묵을 때 자신을 붙들고 살려달라는 미인을 만났다.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그녀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청루에서 빼내주고 살아갈 수 있는 약간의 자금도 마련해 주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청하자 그는 의주상인 ‘임상옥’이라고만 알려주고 돌아왔다. 그 후 십년이라는 고달픈 세월이 흐른 후 박종일 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북경의 최근 현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북경에서 제일 장사를 크게 하는 갑부가 임상옥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중국 길에 오른 날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이 구하여 준 여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그 갑부의 측실로 들어간 후, 아들을 낳아 정실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감사를 표하며 옛날 임상옥이 치른 돈 열배를 주었고 그 갑부와 독점 거래를 트게 해 주었으니 이 거금이 후에 임상옥이 거상으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바람직한 우리의 모습이겠지만, 가진 사람들 중 혹시라도 ‘존경, 그런 거 필요 없소’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쓰러져도 괜찮다는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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