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릴 무렵 옆 동네로 놀러갔던 한 노인이 마을 어귀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아래 검은 옷을 입은 키가 큰 남자가 보였다. 노인은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이올시다. 무슨 일로 우리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게요 ? 볼일이라도 있소 ?’ ‘나는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라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늘 밤에 죽을 100명의 영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지요’. ‘뭐라고요 ? 저승사자. 그게 참 말이오 ?’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난이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도움을 줄 일이지 어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손 놓고 기다린단 말이요 ?’. ‘진정하시오. 이게 바로 내 일이라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지요’. 남자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노인은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마을로 뛰어왔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각별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노인의 말에 마을은 삽시간에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세상에, 앞으로 죽을 영혼이 100명이나 되다니, 혹시 나도 죽는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논의 해 보아도 신통한 결론이 나올 리 없었다. 사람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둠과 함께 공포의 무거운 기운이 마을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간간히 아기울음 소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갈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화가 머리끝 까지 난 노인은 씩씩거리며 마을 어귀로 찾아 가 소리를 질렀다. ‘저승사자 이놈, 냉큼 나오지 못 하겠느냐? 신의도 모르는 놈아, 모습을 드러내라’. 저승사자가 노인 앞에 나타났다. ‘당신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나한테 화낼 일은 아니지 않소’. ‘이놈, 왜 네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 너는 분명히 100명을 데리고 간다고 했다. 그런데 어젯밤 죽은 사람은 무려 1,000명이나 되지 않느냐 말이다. 이런데도 내가 화를 안 낼 수 있단 말이냐?’.
 날이 밝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부고가 날아들었는데 예상했던 100명의 열배가 넘는 1,000명이 넘었던 것이다. ‘촌장, 내 분명히 말하리다. 나는 분명 어제 말한 숫자만큼의 사람만을 데리고 갔다오. 나머지 사람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그들은 공포와 조바심이 데려간 것 뿐 이라오’.
 이처럼 공포와 걱정, 초조함은 저승사자와 같은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이미 습관화 되어 의식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심리반응은 나아가 그에 상응하는 정신질환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포, 초조감, 걱정, 우울증, 질투, 적대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파괴력이 강하므로 오랫동안 노출될 경우 심한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기쁨, 분노, 즐거움, 슬픔, 상실감 등 우리는 일생동안 갖가지 감정을 경험한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건강에도 매우 중요하다. 안정되고 유쾌한 감정은 신체를 건강하게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이야기 속의 저승사자와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뭐라 해도 죽음은 생활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평화를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평화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활력이 왕성할 때에는 사람이 이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때이다. 병에 걸렸을 때 사람은 대개 죽음을 의식하게 되고 그 가까이 가게 된다. 생의 마감을 확실하게 깨닫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오게 되어있고, 바로 그 순간을 향해 ‘이제 죽어도 괜찮다’ 한 마디를 준비하며 달려가고 있는 인생길일지도 모른다.
 
 ‘관계(關係)하지 아나하다’라는 여덟 글자를 줄인 것이 ‘괜찮다’ 이다. 관련이 없으니 마음 쓸 일 없다는 뜻일 수도 있으나, 지금은 주로 어떤 사안이 네게 나쁜 영향을 끼칠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의 일부다. 그야말로 가난해도, 애통해도 괜찮으니 위로를 받으라는 격려의 말이다. 복을 받는다는 말은 무병장수 또는 만사형통을 뜻함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얼마나 사람답게 성숙해 가고 있는지가 복 받음의 척도임은 물론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는 일들에 불평을 토로하기에 앞서 그 속에 숨어있는 ‘괜찮다’의 위로에 힘입어 새로운 도전에 나설 용기를 얻어 나가야 할 일이다. 쇠는 뜨겁게 달군 후라야 굳어지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시련을 통하여 더 강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시련을 겪지 않고는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이 고난과 시련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깨닫게 하고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말이다. 일관하여 변하지 않는 목적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번거롭고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적은 적어도 행복한 인생을 위한 불가결의 조건 중 하나이다. 그리고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적당주의의 안전 불감증 ‘괜찮아’가 아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괞찮다’에 힘입어 보다 크고 값진 인생의 목표를 향해 힘 있게 나아갈 일이다.
 인생은 고뇌도 환희도 아니다. 인생은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적 과업이다.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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