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언어와 문자는 인류의 문화, 문명 일체를 이끌어 온 수레의 앞 뒤 바퀴이며 문명은 언어와 문자의 소산이다. 언어나 문자가 있기 이전에는 손짓, 몸짓을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점점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사물의 인식, 논리적 사고체계 정립 등에서 그림이나 약속기호로 의사소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귀로 전해지려면 두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같이하지 못한다면 말하는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청각에 의존하는 방식의 불편이 너무 크자 인간은 말을 시각화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물이 글이다.
 다시 말해 글이란 인간의 사고를 시각화해서 생산, 저장, 유통시키는 도구인 것이다. 많은 문자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언어들은 경제활동에서 기인한 숫자계산, 거래, 재고파악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고대 문자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자는 출현 순서대로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갑골문자, 그리스 문자 등이다.
 문자 체계의 진화는 대체로 그림문자, 뜻글자, 소리글자의 순으로 발전되어 왔다.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6,000여 개) 있고 또 이 언어들을 기호 또는 문자로 표기할 수 있는 글(文字) 또한 많다(100여 개 정도). 그 중 유독 어느 언어만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다는 수식어 까지 붙인다면 언어 표현상의 모순성을 지적할 수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특정 단어를 예로 든다면 어느 나라 말이든 외국어로 의미를 전달할 때 한 단어를 수많은 의미로 풀이해도 그 뜻풀이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 한 예가 우리말의 ‘한’이고, 이 ‘한’에는 하나, 큰, 대략, 딱(딱 맞다 등),정확히(한 가운데 등) 무려 서른 몇 가지의 의미가 있어서 한국인도 잘 못 쓰거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 많은데 외국인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중에서 바로 그 크고 위대하다는 의미의 ‘큰(한)글’이 지금의 위대한 ‘한(큰)글’이라는 말이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기본 특징은 입으로 발성할 수 있는 폭 넓은 소리의 표현으로, 현존하는 문자 중 한글만큼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은 없다. 이는 한글이 창제될 당시 주변 나라들의 말, 즉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글들을 우리의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창제의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뜻이 아닌 소리에 치중한 결과다.
 이처럼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글자로 인정받아 유네스코에서 한글 창제자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여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에게 매년 ‘세종대왕 상’을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또 언어만 있고 문자가 없는 곳에서는 한글로 그 소리(음가)를 적어 사용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창제 당시 최만리 등의 반대파들은 한자(漢字)로 된 문화와 예악, 학문 등이 한글로 풀이되면 그 품격이 천박해 진다는 논리였으나, 그 속내는 천민이든 누구든 쉽게 글을 배워 사대부들만의 특권이던 관계(官界) 진출을 두려워 한 것이고, 세종은 앞으로도 과거는 변함없이 한자로만 응시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이 외에도 왕의 애민사상 또한 창제의 주요 목적이 되었으니, 진주(晉州)에 살던 김화 라는 백성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친족살인사건이 그것이다.
 왕은 이 사건이 자신에게 덕이 없어 일어났다고 한탄하며 효행록을 수정 증보한 ‘삼강향실도’를 편찬하고, 백성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그림을 붙이고 쉬운 한문을 써서 편찬하여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창제의 목적은 한문 음 등의 표준화, 음률의 용이한 해석, 풍속 바로 세우기 등으로 요약된다. 정음의 창제는 우수한 언어학자 수준의 실력자였던 세종이 주도했고, 집현전의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최항, 이선로, 강희안 등이 이를 도왔다.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실 가족들도 참여하였으며, 특히 딸인 정의공주가 한글로 구결을 표현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정음이 반포되자 유학자 출신의 문신들은 정음을 언문이라 천시하면서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하급 관리들은 공문서에 이두를 쓰는 한 편 언문을 반드시 배워야 했다. 그래도 한문은 학문이나 증명을 삼을만한 것을 적을 때에는 필수였기 때문에 한문 쓰기 자체가 신분이나 권위를 의미하기도 했다.
 정음이 반포되자 궁중의 여자들이 제일 먼저 언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 급속으로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초기 언문 보급의 최고 공로자가 여성들이었고, 그 다음은 서민층 남자들이었다. 그 후 격문이나 금령 따위를 알릴 때에는 일반 백성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언문으로 길거리에 방을 붙였다. 또 정음은 창제 때부터 단절되어 있던 지배층과 피 지배층의 언로소통에 큰 역할을 했다.
 한글로 상소하거나, 한글로 대자보를 붙일 수 있어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지배층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궁에서는 왕후나 대비들이 언문으로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릴 수 잇게 된 것이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칠 때 한글로 음과 훈을 달아 가르쳤다. 또 서당 외에 한글 보급에 큰 역할을 한 통로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한글판 소설이었다.
 언문은 연산군 때에 최초로 탄압을 받은 적이 있다. 연산군은 민간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언문으로 적어 돌리거나 거리에 붙이는 일이 벌어지자 언문으로 역은 책을 불태우라 명하고 한 동안 언문 사용을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투서 범을 잡을 동안뿐이었고, 그 후의 연산군 치세 동안 한글 사용을 금하지 않았으며, 한글로 역사책을 번역하도록 했고, 제문을 번역하거나 악장을 한글로 인쇄하기도 했다. 연산군 치세 내내 한글 사용을 금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왕은 한문만 숭상하고 정음을 우습게 여겨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에를 들면 사극 등에 인현왕후전 또는 장희빈의 주인공인 숙종은 상소문이 한글로 올라오면 이를 읽지 못해 한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읽었다 한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주교의 전래가 한글 보급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는 정약종의 ‘주교요지’였고,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이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서, 찬송가 등을 몇 권씩 가지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인들 중에는 평등을 부르짖는 중인, 서얼, 천민, 여성들이 특히 많았기 때문에 천주교 교리서는 대개 한글로 써져 있었던 것이다.
 고종도 세종과 생각을 같이 한 대목은 법률 문에 대한 한문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싶었던 생각이고 그래서 나온 칙령이 있다(1,894,11월). ‘법률 칙령은 다 국문을 본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 한다’. 그 동안 정음이 상말이라는 격하된 의미의 언문, 언서, 언어에서 심지어는 암 클, 아래 글, 중 글, 절 글, 반절 등 온갖 천한 이름으로 대접 받아오던 한글이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당당한 ‘국문(國文)’로 제자리(이름)를 찾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이 순 한글로 발간된 것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창제 후 45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한글이 조선의 전면적 표기 수단으로 공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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